나의 이야기

[스크랩] 춘천 가정리지명2

천안한화빙그레 2014. 4. 29. 15:27

  - 가정자(柯亭子): 부질과 주일당(主一堂) 사이를 가정자라 한다. 이곳에 가나무(또는 갈나무)로 만든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때문에 가정리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가정자는 누가 지었는지, 언제까지 있었는지 등 어떤 형태의 정보도 전해지지 않아서 현재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지명과 관련해서 가정자가 있었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 가나무는 떡갈나무의 일종이다.

가정리 입구 뱃터(가정나루)에 갈나무 정자가 큰 게 있었는데 배와 뗏목을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쉬어 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갈나무(참나무) 있는 동네라고 부르면서 마을 이름이 가정자로 불리게 됐다고도 한다.

  또 강 옆에 있는 나무라 해서 강가 나무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 가정초등학교: 이 초등학교는 1937년 9월 1일에 가정보통학교 설치인가가 나서 건립되었다. 1937년 10월 20일 약암 공회당에서 개교를 해서, 2009년 지금 있는 건물에서 폐교를 했다. 현재 있는 초등학교 건물로 옮기기 전에는 현 건물 약 100여m 앞에 위치해 있었다. 잦은 침수로 인해 1971년 8월 17일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가정리 주민들은 지게와 리어커 등을 이용해 학교 신축을 도왔다. 그리고 1987년 9월 23일에는 새로 현대식 건물로 지었다. 2009년 폐교될 때까지 가정리와 그 인근의 초등교육을 담당해 왔다. 현재 국제창의 미션스쿨이 교육청에서 초등학교 건물을 임대받아 운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6.25한국전쟁 중 인공 때는 북한에서 파견한 교장 밑에서 인공교육을 받았던 적도 있다. 역사의 수난기를 모두 거친 학교이다. 아울러 가정리, 박암리, 관천리 일대의 사람들을 동문으로 묶어 단결하게 만든 역할도 하였다.

  가정초등학교 교사는 류 씨가 아니면 할 수 없을 정도로 류 씨들의 텃세가 세었으며, 류 씨가 아니면 류 씨의 사위로 삼아서 근무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처음 초등학교가 생겼을 때 한문학과 신학 간의 갈등이 아주 심했다. 특히, 종손들은 학교를 보내지 않고 서당에만 다니게 하기도 했다. 또 초등학교마저도 집안이 가난해서 다니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TV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정초등학교에 모여 TV 시청을 했다. 당시 ‘여로’라는 드라마가 유행했다고 한다.

  - 강원도학생교육원: 가정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해있다. 정문 오른쪽 산에는 고흥류씨분산동구라는 한자로 써진 작은 표석이 있다.

  강원도 학생교육원은 의암 류인석 등 구국항쟁으로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강원도교육청에서 건립한 학생교육원이다. 가정리에 세워진 이유가 의병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중고생들을 뽑아 나라사랑 교육을 실시한다.

  설립목적은 선현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 심신단련을 통한 인격의 도야로 호국의 얼을 다지어 선진조국의 주역이 될 자주적, 창조적, 도덕적인 한국인을 육성하는데 있다고 한다.

  1988년 9월 3일 교육부 승인을 받아, 1990년 2월 6일에 개원을 해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남학생 위주로 교육을 하고, 강릉에 있는 사임당교육원에서는 여학생을 중심으로 교육을 한다. 강원학생교육원을 수료한 학생은 2009년 12월 31일까지 69,465명이었다.

  - 개경자: →가정리. 가정자. 갱자. 가정나루 부근을 개경자라 한다.

  - 갱자: →개경자, 가정자. 개경자의 준말표현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세 가지를 다 쓰고 있다. 가정자 앞에는 홍천강의 가정나루가 있었다.

  - 거리제터: 가정리에는 두 곳에서 거리제가 있었다. 한 곳은 1리의 지방서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현재 유인석 기념관 있는 곳이었다. 1970년대까지 지내다가 없어졌다. 또 한 곳은 3리의 거리제터인데 농바우 있는 곳이었다. 현재는 재궁교 밑에서 지낸다. 농바우에서 재궁교로 장소를 옮긴 것은 농바우가 도로공사 때문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3리의 거리제는 격년으로 지내는데 재궁동산제를 지내고 나서 재궁교 밑에서 개를 잡아 지낸다. 농바우가 없어지면서 한 동안 지내지 않다가 2008년부터 다시 지내게 되었다. 다시 지낸 이유는 어디 가서 점을 보거나 하면 거리제 이야기가 자주 나타나서였다. 어차피 동네 사람들에게 좋다는데 어려운 것도 아니니 다시 지내자고 해서 재개되었다.

  2리는 1리와 3리에서 막아주기 때문에 따로 거리제를 지내지 않았다. 거리제는 정월달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이를 막고자 지냈으며, 제물로 개를 잡고 소지를 올렸다.

  - 경로당: 가정리 경로당은 류인석 기념관 주차장 옆 남면 게이트볼장 뒤에 있다. 경로당 현관에는 경로당을 지을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을 나무판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짚공예작품 등이 벽에 걸려 있다.

  경로당은 이 지역 노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경로당은 기금이 조성돼 있어서 그것으로 운영을 하는데, 모자라면 얼마씩 거두어서 보태기도 한다. 현재 이곳에는 할머니 한 분이 기거하면서 관리를 하고 있다. 그 할머니는 경로당 운영비로는 관리가 어려워서 남의 토지를 도지로 부쳐 생활비를 보충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가정리에서 유일하게 게이트볼을 치는 여성이다. 할아버지들이 게이트볼을 칠 때 인원이 모자라면 불러서 같이 친다. 노인들이 모임을 갖게 되면 술안주나 음식을 마련해서 먹을 수 있도록 한다.

  경로당 인근은 가정리 시장이 섰으며, 주막거리를 형성했던 가정리에서 가장 번화했던 지역이었다. 우시장, 잡화시장, 생필품시장 등이 열려서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다.

가정리의 중심가로 지금도 경로당, 게이트볼 장, 의암기념관, 버스정류장 등이 있어서 가정리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 고란터: 고란(皐蘭) 또는 난곡(蘭谷)이라고도 했다. 가정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정리에서 박암리 방면으로 가는 곳이다. 지금은 청평호에 묻혀서 원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예전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고란터 나루가 있었다.

  조선조 광해군 때 류몽표(柳夢彪, 1543-1616)의 아들 태우(泰宇) 류활(柳活, 조선 선조 때 문신, 자는 源叔)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고란을 심고 살았다. 후에 충청도 목천(木川)으로 이사했다. 고란초(皐蘭草)는 바위에 붙어 자생하는 난초의 일종이다.

  고란터 지역은 문화재 굴터 지역으로 묶여 있다고 한다. 주춧돌, 기와, 숟가락 등이 땅을 파면 나온다. 주춧돌, 맷돌 등은 사람들이 가져갔다.

 

출처 :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글쓴이 : 이학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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