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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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79년 12월 21일 - 1980년 8월 15일 |
국무총리 | 최규하 (1979) 신현확 (1979 ~ 1980) |
전임: 박정희(제9대)
후임: 전두환(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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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9년 7월 16일(1919-07-16) |
출생지 | 대한제국 강원도 원주시 |
사망일 | 2006년 10월 22일 (87세) |
사망지 | ![]()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홍기 |
최규하(崔圭夏,일본식 이름: 梅原圭夏.[1]1919년 7월 16일 ~ 2006년 10월 22일, 강원도 원주시 출생)는 대한민국의 관료·정치인이자 대통령 권한·직무대행과 제10대 대통령을 지냈다.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된 이후, 정부수립 후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외무부로 발탁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되었다. 10·26 사건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자는 서옥(瑞玉), 호는 현석(玄石)이며, 또한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부인은 홍기(洪基)이다. 강원도 출신.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교육 활동과 공직 진출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동몽선습〉·〈효경〉 등을 시작으로 〈소학〉·〈논어〉·〈맹자〉·〈대학〉·〈중용〉·〈통감〉 등을 읽었다고 한다. 1926년 8세 때 원주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한문과 예절을 배우는 가정학습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1932년 4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2] 4학년 때인 1935년 11월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洪炳純)의 세째 딸 홍기(洪基)와 결혼을 했다. 1937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하였고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 3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에 입학, 1943년 만주 국립대동학원을 졸업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가 1946년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면서 공직에 투신, 농림행정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는 농림부로 보직되어 근무하며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되었으며,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2] 이 회의에서 그는 외국어 구사능력과 국제회의 대표로서의 활동력을 인정받아 인재의 적재적소 보임을 주장하던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 의해 발탁되었다.[2] 이후에는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이 되었다.
[편집] 외교관 활동
1952년 7월 17일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7년 5월 16일 주일대표부 참사관 등을 지냈다.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그 해 귀국하여 외무부차관이 되었다. 그러나 4·19혁명 후인 1960년 5월 12일 외무부 차관직을 사임했다.[2]
1962년 외무부장관 고문, 1963년 외무부 대사를 거쳐 그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되었으며, 1964년 주말레이시아 한국 대사를 지내고 귀국하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장관으로 재임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한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하기도 했다.[2]
[편집] 국무 총리 서리와 총리 재직
1975년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1976년 3월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선출되었다. 국무총리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하였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피습을 받고 암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자동적으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직무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받게 되었다. 박정희는 시해 직전까지 계속되었던 독재적 통치로 유발된 정치적 불안은 계속 되었으며[출처 필요], 최규하는 유신헌법을 대신하는 신 헌법과 민주적 선거를 약속한다.
10월 27일 새벽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그는 박정희 피살사건의 조속한 수사를 명령하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10월 26일자로 소급해임하였다. 그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부 구성을 명령하여 육군대장 정승화를 계엄사령부 사령관으로, 육군소장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여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에 대한 조속한 수사를 지시했다. 11월 3일 암살된 박정희의 빈소에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명칭 변경)을 추서하고, 국장(國葬)을 결정, 박정희대통령국장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국장을 주관하였다.
[편집] 대통령 시절
이 부분의 본문은 최규하 정부입니다.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2] 이후 최규하는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새 정부 출범을 국민들에게 약속하였다. 12월 12일 전두환과 뜻을 같이하는 군부 세력들이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12.12 사태). 이들은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자리에서 밀어내고 1980년 초에는 결국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하게 된다.
이어 전직 대통령 윤보선으로부터 유신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는 서신을 받았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은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생존한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을 의장으로 피선하였다. 이후 국정자문회의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1980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수여받았다. 2월 29일 최규하는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등 재야인사와 운동권 인사 687명을 복권시켰다.
1980년 4월 전두환과 다른 정치가들의 강요에 의해 최규하는 전두환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 중앙정보부는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보부에서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 없다고 결론 내렸다. 5월 13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는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발표 했으며, 심지어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하였다. [3]
5월 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할 의도에서 수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보안사에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하는 집권 시나리오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하였다. 5월 17일에는 전두환은 이에 따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 때부터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한다. 이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또는 5.17 쿠데타로 불린다.[4] 1980년 5월 당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국수습방안'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최규하는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에게 "헌정질서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 한번으로 족하다. 모든 일은 법테두리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여 신군부측의 `시국수습방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5]
이 때까지 서울, 대전과 광주 등지에서는 민주화를 기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격앙되어 있었다.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이후에도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 되었고, 이를 빌미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광주에 계엄군을 출동시켜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0일간의 유혈 진압으로 200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다. 1980년 5월 최규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80년 7월 30일 경기도 수원의 새마을 연수원을 시찰했다. 이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0년 7월 30일 신군부의 부탁을 받고 김정렬은 청와대로 찾아가 최대통령과 5시간 담판을 하여 최대통령을 하야를 요구하였다. 8월 16일 대통령직과 일체의 공직을 모두 사임했으며,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편집] 퇴임 이후
1981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이후 국정자문회의 평의원으로 있다가 11월 직전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이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자 국정자문회의를 다시 맡아보기도 했다. 19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기금을 기부하였다. 1985년 1월 17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낙준의 추모 예배에 참석하였다. 1991년 이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제3대 의장을 지냈다.
1993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로부터 의장 연임 건의가 들어왔으나 사양하고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을 후임으로 내정했다. 이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명예의장에 추대되어 2006년까지 재임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로부터, 신군부가 사법처리의 대상에 올라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지만, 그는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퇴임 이후 상당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편집] 사후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오전 7시 37분께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6]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루어졌으나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만 참여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 생가는 원주시 봉산동에 소재하며 현재는 원주역사박물관내에 있다.
비망록을 남겨놓았으니 비망록을 참고하라고 하여 이때 많은 사람들이 재임 당시 신군부에 관련된 일을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갔다. 그의 비망록의 행방은 현재 오리무중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광주사태 당시 관련자로 추정하여 광주 7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편집] 약력
- 1941년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만주국 국립 대동학원을 정치행정 전공으로 수료하였다.
- 농림부 양정국 양정과장
-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 1947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
-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
- 19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 [7]
- 주일대표부 참사관
- 1959년 주일대표부 공사
- 외무부차관
-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외교담당 고문, 의장
- 1964년 말레이시아 대사
- 1967년 외무부 장관
-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 1975년 국무총리
- 1979년 대통령 권한대행, 무궁화대훈장
- 1979년 제10대 대통령
- 1980년 대통령직 사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1981년- 1988년 국정자문위원회 의장
- 1984년 12월 18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국정자문위원회 위원 오찬에 참석하다.
- 1991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편집] 기타
[편집] 상훈
[편집] 학력
[편집] 가족 관계
- 아버지 : 최양오 (崔養吾)
- 어머니 : 전주이씨
- 부인: 홍기
- 자녀(2남 1녀)
-
- 장남: 최윤홍(崔胤弘, 한국전시산업진흥회 부회장)
- 차남: 최종석(崔鍾晳, 하나알리안츠투신 대표이사)
- 장녀: 최종혜(崔鍾惠)
- 남동생: 최명하, 최중하
[편집] 최규하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 드라마
- 1993년 김성원 - (제3공화국) MBC 드라마
- 1995년 김성겸 - (제4공화국) MBC 드라마
- 1995년 김진태 - (코리아게이트) SBS 드라마
- 2005년 김성겸 - (제5공화국 MBC 드라마
[편집] 영화
[편집] 같이보기
[편집] 참고 자료
[편집] 주석
-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만주의 친일파"(2004년 3월 7일)
- ↑ 가 나 다 라 마 바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0c3174a
-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064886 경향신문 2010년 5월 12일자 기사
-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12270124 조선일보 1996년 1월 22일자 기사 5.18사건 재수사 종결,내일 기소
- ↑ 신군부,시국수습안 대통령 반대불구 강행
- ↑ 《연합뉴스》(2006.10.22.)
- ↑ 대한민국 직원록 1952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08년 11월 19일에 확인.
![]() |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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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최규하 (권한 대행) |
1979년 12월 21일 ~ 1980년 8월 15일 | 후 임 박충훈 (권한 대행) |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전 임 박정희 (유고) |
대통령 권한대행 1979년 10월 26일 - 1979년 12월 8일 |
후 임 최규하 |
전 임 조정환 |
외무부장관 (직무대리) 1959년 12월 22일 - 1960년 4월 24일 |
후 임 허정 |
전 임 정일권 |
제14대 외무부장관 1967년 6월 30일 - 1971년 6월 3일 |
후 임 김용식 |
전 임 김종필 |
국무총리 서리 1975년 12월 19일 - 1976년 3월 12일) |
후 임 최규하 |
전 임 최규하 (서리) |
제12대 국무총리 1976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979년 3월 - 1979년 12월 5일 |
후 임 신현확 |
전 임 윤보선 |
국정자문회의 의장 1980년 9월 - 1981년 4월 23일 |
후 임 최규하 |
전 임 최규하 |
국정자문회의 의장 1981년 4월 23일 - 1988년 2월 25일 |
후 임 전두환 |
전 임 전두환 |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1988년 11월 23일 - 1993년 2월 |
후 임 노태우 |
전 임 윤보선 |
제3대 민족사바로찾기 국민회의 의장 1990년 - 1993년 |
후 임 윤택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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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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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 상임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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