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육, 개화운동,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를 둘러 보았다. 광복절이 있는 8월도 내일이면 막을 내린다.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미래를 준비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국가관을 되생각해 보는 자료가 되었다. 지금의 국제정세나 국내 정치 상황, 남북문제 등을 살펴보며 염려하는 국민들이 많음을 느긴다. 국가발전을 우선하는 리더십(Leadership)이 필요한 때다.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 1887년 10월 9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에 의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창설자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 해 8월 3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고, 또한 이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종교행사를 하였으나, 전적으로 예배만을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구입해 이를 수리하고 교회이름을 베델예배당(Bethel Chapel)이라고 부르고 10월 9일 첫 예배를 보았다. 이 교회는 초창기부터 그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있어 학생들이 그 교회의 중요 회원이 되어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배재학당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최병헌(崔炳憲, 1858~1927) 충북 제천 출생. 1888년 서양선교사 G. H. 존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선교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893년 세례를 받은 후 전도사로 활약하면서 성서번역과 독립협회 등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서 개화사상·정치개혁사상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1902년 목사가 된 후 곧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청년회(YMCA) 운동에도 관여했으며 1914년부터 8년 동안 서울·인천 지방의 감리사로 활동했다. 특히 협성신학교에서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강의했으며 한국의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한국적 신학을 형성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의 주요저서로는 ‘만종일련’, ‘성산명경(聖山明鏡)’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성산유람기’, ‘죄도리’, ‘사교고략(四敎考略) 등의 글이 있다.
특히, 서재필(徐載弼)이 오랜 동안의 미국 망명생활로부터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정동교회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협성회는 정동교회청년회의 노병선(盧炳善)·이승만(李承晩)·신흥우(申興雨) 등이 주도하였다. 1894년에는 교인수가 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1895년 9월에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성극 등이 열려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남녀평등과 여권신장 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성가대가 운영되었고, 이곳을 통하여 김인식(金仁湜)·이흥렬(李興烈) 등의 음악가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에는 전 교인이 참가하여 일제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았다. 이때의 담임목사는 이필주(李弼柱)로서 33인 중 한 사람이다. 또한, 이 교회의 장로였던 박동완(朴東完)도 이필주 목사와 함께 33인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정동교회는 두 사람의 민족대표를 낸 교회가 되었다. 학생동원은 정동교회 소속인 김진호(金鎭浩) 목사가 배재학당 교사로 있었기 때문에 그 임무를 맡았고, 정득성(鄭得成) 장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므로 모두 붙잡혀서 가을까지 저녁예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청년들은 그 해 3월부터 8월까지 비밀리에 '독립신문'을 제작, 등사하여 배부하다가 붙잡혀 징역형까지 받았다. 3·1운동 이후에는 주로 문화운동과 무산대중을 위한 야간학교 개설 등을 통한 선교활동을 전개했고, 1930년에는 남북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해 하나의 민족교회인 조선감리교회 창설에 교회직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3년에는 김인영(金仁泳) 목사와 신흥우 등이 서울의 일부 장로교 지도자들과 손잡고 신앙단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말기의 억압과 역경을 잘 극복한 정동교회는 광복과 함께 감리교단의 분열에 휘말렸으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화해를 강조한 끝에 드디어 1949년에 재건파·부흥파의 합동총회를 개최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 50주년 기념비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예배당 강대 쪽이 폭파되면서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었다. 1976년에 문화공보부가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함에 따라 이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선교100주년 기념예배당은 이 문화재예배당을 비켜서 그 뒤에 지었다. 연건평 1,100평에 달하는 현대식 교회건물을 1977년 11월 6일에 기공하여 1979년 4월 15일에 봉헌하였다. 이 교회는 1980년 10월에 한국건축가협회로부터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정동교회는 다양한 선교프로그램을 통하여 민중을 섬기며 배움의 집, 무의촌진료, 직장인을 위한 예배, 군선교, 방송선교, 미자립교회보조, 해외선교사파송 등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참고문헌 정동교회홈페이지, 다음 브리태니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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