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곡(陵谷): →능골.
- 능골: 능꼴이라고도 부른다. 한자로는 능곡(陵谷)이라 한다. 제청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흥성부원군(興城府院君)으로 추증된 류몽표(柳夢彪, 1543-1616)의 묘가 있어 불러진 것이다. 또는 무덤을 팠다고 해서 능골로 불러졌다고도 한다. 절골 들어가서 첫 번째 골짜기이다. 올라가면 바위가 넓적하고 평편한 게 많다.
능골에 묻힌 류몽표는 우리나라 3대 야담집(어우야담, 청구야담, 동야휘집)의 하나인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쓴 류몽인(柳夢寅)의 형이다. 류몽표는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양주로 피난 가던 중 왜적이 칼로 어머니를 찌르러하자 동생 류몽웅(夢熊)과 같이 몸으로 어머니를 감싸서 살렸다. 당시 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고, 류몽표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 대곡: →대골
- 대골: 대곡(垈谷), 텃골. 고란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 즘터가 있었다고 한다. 즘터는 옹기를 굽던 곳을 말하는데, 지금은 뚜렷한 것이 없다.
- 대장간 터: 여우내골에 있다. 외당(畏堂) 류홍석(柳弘錫, 1841-1913) 장군과 그의 며느리 윤희순(尹熙順, 1860-1935) 여성의병 등이 의병을 훈련시킬 때 병장기를 만들던 곳이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고, 대장간 터 위에는 그 옛날 의병훈련장(義兵訓鍊場)이었다는 표석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 독산(獨山): 딴묏산이라 한다. 약바우마을 뒤와 제청말 앞에 외따로 있는 산이다. 다른 산과 연계되지 않고 홀로 있으므로 독산(獨山)이라고 불러진다. 독산에는 약바위와 할미바위가 있다.
- 동구석(洞口石): →글씨바위, 홍무벽.
- 두리봉: 고란터 뒤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둥그스름하다. 조선지지자료에도 두리봉이라 하였는데, 한자로는 두미봉(斗尾峰)으로 표기하였다.
- 뒤닐고개: 복희안 들어가서 미나리폭포 있는 곳이다. 그곳으로 계속 가면 창촌이 나온다. 예전에 그곳으로 쌀과 비료 등을 짊어지고 강촌까지 넘어 다녔다. 길이 멀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 뒷골: 가정리 뒤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현재 다송목장이라는 염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든바우 밑에까지 화전(火田)을 일궈서 곡식을 심어 먹었다. 저녁 먹고 울력으로 그곳에 가서 짐을 지고 왔다. 마을에서 상당히 먼 곳이지만 화전을 했다.
이쪽으로 넘어가면 발산리의 황골이 나온다.
호랑이가 아이를 물어가서 든바우 밑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집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없어져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서 어린아이를 찾아다녔다. 마을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는데, 든바우 아래에 가니 그곳에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어린아이 혼자 그곳으로 걸어갔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랑이가 아이를 물어서 바위 밑에 갖다놓았다고 하였다.
- 들어앉은 바위: →든바우. 부처바위. 흔들바위. 선바위. 보건소 쪽에서 바위를 보면 들어앉은 바위가 한 눈에 보인다.
- 딴묏산: →독산.
- 류인석 생가 터: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류인석(柳麟錫, 1842-1915) 장군의 생가 터이다. 이곳에서 중국에 가기 전까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81번지이다. 여의내골 입구에 있다. 불에 타고 나서 새로 지은 지가 90여년 된다고 한다. 류혜상(1917년생) 씨의 할아버지가 다시 지은 것이다. 집의 모양은 옛날과 다르다. 지금은 (ㄱ)기역자인데, 그전엔 네모 반듯(ㅁ자)했다. 집의 크기는 9칸이다. 집 앞에는 우물터가 있다.
- 문안골: 절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물갈봉: 옛날에 술워니 고개 쪽 가평으로 넘어가는 곳에 물갈이라는 참나무가 큰 게 있어서 물갈봉이라고 불렀다. 거기어디냐고 물으면 사람들이 물갈나무있는 데를 가리키면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갈봉이 된 것이다. 이 산은 등산객이 많이 오는데, 물갈봉에 올라가면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면 가평시내, 용문산, 유명산, 화악산이 빙 둘러 보인다. 등산하는데 2시간여가 소요된다.
- 미나리골: 산미나리가 나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작은 폭포 또는 미나리폭포라고 하는 폭포가 있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천렵(川獵)도 하고 화전(花煎)놀이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천렵을 한 것은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 미나리폭포: 미나리골에 있는 폭포이다. 원래는 작은 폭포인데 폭포 밑에 산미나리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미나리폭포로 명명되었다. 폭포의 높이는 약 10여 m 정도이나 아주 아름다운 경치를 갖고 있다. 폭포도 크고 아름다워서 소풍과 화전놀이와 천렵 장소로 유명했는데, 오세만이라는 사람이 산판길 닦느라고 위쪽에 있는 바위를 다 부셔서 망가졌다고 한다. 그 미나리 폭포는 쟁골에 사는 박화순 씨가 폭포 밑에 산미나리가 많으니까 미나리 폭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큰 폭포는 구곡폭포를 일컫는다.
지금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데, 찻길이 폭포 위로 뚫려서 폭포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기가 곤란하다.
- 미래미: → 미염이
- 미염(米鹽)이: →미래미. 쇠파니 옆에 있는 곳이다. 늠연실이라는 류숙 공의 사당이 위치한 부근이다. 미래미라고도 부른다. 한자로는 미염(米鹽)이라고 쓴다. 옛날 이곳에 흉년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고흥 류 씨의 선조인 류숙이 갖고 있는 쌀과 관가의 구휼미를 이곳에서 풀고, 소금을 풀어서 아사(餓死)직전에 있던 사람들을 구휼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쌀과 소금을 나누어 준 곳이라는 뜻으로 쌀 미(米)자 소금 염(鹽)자를 써서 미염이라고 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미염이를 미래미라고 발음해서 현재는 미염이와 미래미가 같이 쓰이고 있다. 큰 미래미 작은 미래미가 있다.
류숙 공이 쌀을 나눠주다가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전부 춘천 시내 방면으로 옮겨 살게 했다고 한다.
- 바른골: 삿골 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골짜기로 들어가면 바른 손 쪽에 속한다. 이 일대에는 옛날에 화전을 많이 해 먹었다.
- 박석고개: 고란터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박수고개라고도 한다.
- 방죽: 옛날 가정리 유원지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 장마가 지면 물이 계속차서 유원지의 모래를 준설하고 방죽을 세웠다. 방죽 때문에 지금은 비가 많이 와도 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는다. 유원지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운영하였다.
- 버덩: 평촌.
- 벌개경자: 가정자가 있던 곳의 벌판을 일컫던 명칭이다.
- 병문안: 바위가 양쪽으로 병풍처럼 생겼다.
- 복희안: 보코안이라고도 발음한다. 큰 성골 옆 골짜기이다.
- 부러진 바우: 바위 중간이 갈라져 있는 곳이라고 춘천시 가정리 조사보고서에 나온다. 그러나 가정리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였다.
- 부질: 여우내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가정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충의대교(忠義大橋) 못가서 있는 곳이다. 옛날에 집을 지을 때나 벽을 바를 때 그곳에서 흙을 파왔다. 마차로 흙을 파서 날랐다. 그래서 붙이는 토질이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 같다. 여기 다른 흙은 많은데 찰흙은 거기 가서 파왔다. 새벽을 바를 때 꼭 그곳 흙을 사용했다. 새벽은 집을 지을 때 맨 끝에 바르는 흙을 말한다. 처음 바르는 것은 초벽이라 한다.
- 부처바위: →든바우.
- 부처안골: 쇠파니 너머에 있는 골이다. 그 골짜기를 넘어서면 가정3리가 다 보인다. 절골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부처안골이라 했다.
- 비랭이소: 벼랑 밑에 있는 소이다. 고란터 있는 곳인 왕터 쪽이다.
- 비렁여울: 홍천강에 있는 여울로 벼랑 밑에 있다. 박암리 가기 전에 있다. 보통 비랭이라고 한다. 옛날 박암리 사람들이 비랭이를 지나 학교를 이곳으로 왔다. 이곳 가정초등학교가 남산초등학교 다음에 세워진 것이다.
- 비렁이바우: 벼랑바우라고도 한다. 벼랑 밑에 있는 바위이다.
- 빗들 배깃들: 왕동 위쪽에 있는 들이다. 흥성부원군 류몽표와 그 아들 취흘(醉吃) 류숙(柳潚) 부자(父子)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어서 불러진 지명이다. 빗들은 비석이 있는 들이라는 뜻이다. 늠연실 옆이다. 지금은 늠연실을 옮겼다. 옮기기 전에 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