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무한 신뢰--기도로 내조한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천안한화빙그레 2013. 8. 11. 10:01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무한 신뢰--기도로 내조한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2)|  
//

1986년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던 정 회장이 부부동반 만찬을 열었을 때, 만찬장 구석에 수수한 한복 차림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변 여사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 회장이 나타나 아내를 안내할 때에야 비로소 참석자들이 황황히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천만원도 쓸 사람”

고희를 맞은 1985년 부인(변중석)과 함께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

그렇다고 변 여사가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생전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가끔 회장님이 이제 우리도 잘살게 되었으니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세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대답하죠. ‘걱정 마세요. 당신이 쌀 한 가마니를 누구에게 주라고 시키면 나는 두 가마니를 주는 사람입니다.’”

변 여사는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도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마음이 약해서 물건 값도 잘 못 깎는다는 그는 부산 피난 시절, 거리에서 포도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손님이 달라는 대로 다 주다보니 이익은커녕 밑지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부러운 게 없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부러운 거 하나도 없지요. 난 욕심이 없어요. 회장님은 ‘우리 몽구 어멈(정 회장이 변 여사를 부르던 호칭)은 몇 백만원, 몇 천만원을 줘도 하루에 다 쓸 거다’ 하세요. 사실 내가 그래요. 누가 와서 돈 달라고 하면 그냥 줘버려요. 그래서 (회장님은) 나한테다 돈을 전혀 맡기질 않아요.”

인정이 많았던 변 여사는 1년에 설과 추석 전후로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아원 방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재벌가 아내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돈도 남편 주머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한 것이었다.

변 여사는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저금통장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액수야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시어머니가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받는 며느리들 마음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재벌가 식구가 되어 사치를 부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리라. 변 여사는 또 며느리들에게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해야 하며,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 매년 새해 아침에 한복을 한 벌 씩 지어 입히는 자상한 시어머니였다.

변 여사의 마음 씀씀이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진 것으로도 유명했다. 남편이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지으면서 집도 이곳으로 옮겨가자 밤샘하는 공장직원들의 밤참을 해다 먹였다. 나중에 현대의 규모가 커졌을 때는 직원식당 주방장을 자처하며 구내식당을 책임졌다. 현대사옥이 무교동에 있었던 시절, 변 여사가 만들어주는 음식이 맛있어서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는 직원이 드물었다고 한다. 변 여사는 1991년 병원에 장기입원하기 전까지 매년 메주를 쑤어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아예 경기도 덕소에 메주 공장을 세워 40년간 운영했다. 남편의 기업이 커질 때마다 메주 수가 늘어났다.

얼굴 한 번 안 보고 결혼

변 여사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옥마리라는 곳이다. 정 회장 집과 2㎞쯤 떨어져 있는데, 결혼 전에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밑에서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변 여사는 그 시절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계집애’라는 이유로 보통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과 교회 야학을 통해 한문과 언문을 깨쳤다.

양쪽 집안 간에 다리를 놓은 이는 변 여사 친정과 한동네에 살았던 정 회장의 넷째 숙부다. 성품이 곱고 후덕한 변 여사를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았다가 조카 정주영이 결혼적령기에 이르자 맞선을 주선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23일 밤 변 여사 집에서 처음 대면했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총각의 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확 열리는 것 아닌가. 사내는 놀라 얼굴을 감춘 소녀를 힐끗 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나가버렸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지만 그 시절엔 그렇게 이미 양가 친척들이 사돈을 맺자고 약속한 사이라면 별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친정어머니의 반대가 있긴 했다. 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남자 쪽 집안이 너무 기우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당시 청년 정주영은 서울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다고는 하지만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점원에 불과했다. 집안도 가난하고 시동생도 너무 많으니 친정어머니로선 딸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변 여사 가족도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정 회장 쪽보다는 유복한 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딸을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은 변 여사의 큰오빠 인석씨가 정 회장 편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인석씨는 정 회장보다 한 살 위로 송전보통학교 선배였는데, 예비신랑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변 여사는 결혼해 서울로 올라온 뒤로 친정식구들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다. 변 여사가 출가한 직후 친정이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후 분단이 되면서 소식이 끊긴 것이다.

정 회장은 생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 전인 일제 때라도 아내를 친정에 보내주지 그랬냐?”는 질문에 “허허, 그래 내가 못 가게 했지. 돈 벌어 가자고 밤낮 얼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구만”이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변 여사는 “아니에요. 친정 안 보내준다고 야속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당신도 이때껏 고향을 못 가보았잖아요”라고 답했다.

어떻든 두 사람은 1938년 1월8일 혼례를 올렸다. 정 회장 나이가 21세, 변 여사 나이 15세였다. 변 여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첫날밤, 무슨 사람이 이렇게 크고 무섭게 생겼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浮沈 많은 사업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

오순도순 신혼생활은 처음부터 없었다. 신랑이 “3개월만 시부모님 모시고 살아라. 곧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던 정 회장은 결혼할 무렵에 독자적으로 쌀가게를 해볼 요량을 갖고 있었다. 그때까지 쌓아놓은 신용을 바탕으로 직접 쌀을 떼어다 배달을 하면 이문을 더 남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정말 3개월이 지나자 남편으로부터 서울로 오라는 기별이 왔다. 교통수단이 마땅하지 않던 시절이라 변 여사는 시집이 있는 강원도 통천에서 서울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남편을 만나 따라간 곳은 지금의 대학로가 있는 동숭동 뒷산 ‘낙산’이라는 산동네. 꼭대기 허름한 판잣집 문간방이 거처였다. 변 여사의 회고다.

“시골서는 아무리 못살아도 작은 초가집에서라도 살았는데…. 어찌나 서글프던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 시골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회장님이 ‘서울에선 다들 이렇게 산다, 얼마 동안만 참자, 남들처럼 우리도 곧 잘살 수 있다’고 달래시더라고요. 그래서 눌러앉기로 했지요. 하지만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남편의 사업은 굴곡이 많았다. 정 회장이 쌀가게를 하며 자리를 잡을 만하니까 일제가 1939년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경일상회’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한 지 3년이 못되어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자 난데없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리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직원의 실수로 불이 나 잿더미로 변했다. 남편은 굴하지 않고 평소 신용이 두터웠던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재기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서울에 다니는 승용차라고는 몇몇 귀족과 총독부 고위관리, 일본군 사령부 사단장과 참모장, 조선은행 등 큰 일본회사 몇 군데가 가지고 있는 게 전부였다. 수리공장이 별로 없다보니 차가 고장 나면 고관대작들의 발이 묶였다. 빨리 고쳐주는 곳이 최고였다. 정 회장은 열흘 걸릴 것을 사흘에 고쳐주는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며 수리비를 많이 받았다. 장안의 고장난 자동차들이 정 회장이 운영하는 신설동 ‘아도서비스공장’으로 몰려들었다(아도서비스란 애프터서비스의 일본식 발음).

정 회장이 현대그룹의 모체가 되는 건설업을 시작한 것은 광복 후다. 광복 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시 사업에 나선 그는 건설업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한 번에 거래하는 돈은 기껏해야 30만~40만원 정도인데, 건설업자들은 1000만원씩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정 회장은 1948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해체하고 직원 대여섯 명으로 ‘현대건설’이라는 새 간판을 내걸었다.

 

정주영은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세 번이나 가출을 시도하며 주어진 운명에 맞선 젊은이였다. 무엇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 절대 긍정의 소유자였다. 그의 ‘18번’은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평소에도 “겨울은 밤이 길어 좋고, 여름은 해가 길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렇다보니 현대그룹 회의석상에서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금기시됐다. ‘안 된다’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패배로 받아들여졌다. 정 회장이 부하 직원들을 다스리는 방식도 혹독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자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호칭도 ‘아버지’나 ‘아빠’가 아니라 ‘회장님’이었다.

엄부자모(嚴父慈母)

엄한 남편을 모시고 사는 변 여사는 늘 조마조마했다.

“아이들도 아버지가 무서우니까 무척 어려워했어요. 자나 깨나 조심 조심이었죠. (아버지)묻는 말씀에나 대답할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항상 나를 통해서 얘기했지요. 아이들을 감싸고도는 것이야말로 내가 집에서 해야 할 큰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용돈 1만원을 달라고 하면 5000원만 주라는 것이 남편의 지시(?)였지만, 변 여사는 꼬깃꼬깃 몰래 감춰둔 돈을 자식들에게 건네주곤 했다.

생전에 한 기자가 “자식들 키울 때 속상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자 변 여사는 “속을 썩여도 욕 한마디 안 하고 지냈다. 원래 내가 속상할 땐 말을 안 한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젖을 물리고 애와 함께 울었으면 울었지 누구한테 말을 안 했다. 오죽하면 시집와서 회장님이 벙어리를 데리고 왔다 했을까”라고 답했다. 변 여사의 말이 이어진다.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 기를 때가 가장 어려웠다. 여럿이다 보니 별 놈 다 있잖은가. 회장님은 늦게 귀가하시니까 집안 돌아가는 사정은 하나도 몰랐다. 그래서 내 책임이 무거웠다. 회장님이 애들 야단칠 때는 내가 야단을 맞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 내 잘못인 것 같고…. 애들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자식을 아홉이나 두었으니) 수험생활을 9번이나 한 셈이다.”

시동생들도 큰형님을 무서워하다보니 의논할 일이 있으면 모두 형수인 변 여사를 통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여성중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변 여사는 정 회장을 “손님 같은 남편”이라고 했다. 잦은 출장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비우고 부부동반으로 출장을 간다 해도 하루 종일 아내를 호텔방에 두고 자기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무심한 남편이었다. 남편의 부재를 견디는 변 여사의 유일한 마음 다스리기는 ‘기도’였다. 남편이 현장에 나가 밤을 새울 때, 자신도 밤을 새우며 남편 하는 일이 잘되기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1985년 2월호 ‘여성중앙’ 기사에 소개된 기도문의 일부다. 구구절절 가슴을 따뜻하게 하면서 힘을 주기도 하는 기도문이라 다소 길지만 인용해본다.

‘주여, 약할 때 자기를 분별할 수 있는 강한 힘과 무서울 때 자기를 잃지 않는 위대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힘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도록 가르쳐주시옵소서. 웃을 줄 아는 동시에 울음을 잃지 않는 힘을, 미래를 바라보는 동시에 과거를 잃지 않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것을 다 주신 다음에 이에 대하여 유머를 알게 하여 인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시고, 자기 자신을 너무 중대히 여기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은 소박하다는 것과, 참된 지혜는 개방적인 것이요, 참된 힘은 온유한 힘이라는 것을 명심토록 하여 주시옵소서.’

변 여사는 기도문을 몇 번이고 외고나면 남편이 지구 반대쪽에 가 있을 때라도 집안이 훈훈해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기도문을 신문지 서너 장 펼친 것만한 액자로 만들어 집에 걸어놓았을 정도다. 그리고 9남매가 사는 집집마다 기도문을 안방에 걸어놓고 며느리들도 읽게 했다고 한다

 

출처 : 두꺼비의노래
글쓴이 : 쟈스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