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1946년~1979 KBS 영상실록과 53년전 4.19혁명, 그날의 가슴 찡한 영상들

천안한화빙그레 2013. 9. 17. 11:46

영상실록(KBS)

 

영상실록 - 1949.avi (28:53)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l4Hhc5d4lEY

 

 

영상실록 - 1950 6.25 가 일어나고.avi (28:20)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OEXuyISMKM

 

 

영상실록 - 1960 4.19가 일어나던 해.avi (29:21)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r4E9Tm7sOp8

 

 

1960년 4월 19일, 그날의 장면들을 사진과 글로 되새기며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955166

 

<요약>4·19 혁명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위가 이루어낸 혁명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였다.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준 혁명이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으로도 일컫는다.

 

4월 19일 이전의 상황

 

이승만 정권은 종신집권을 위하여 언론과 사회 전반에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워 대구 도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고 있는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마산시민들.)

(시위 중인 학생들.)

(시위중인 여학생들과 막아선 경찰들. 총대를 맨 것에서 그들의 위급함이 느껴진다.)

(당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한 학생의 시신.)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3·15 마산시위)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치안국장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당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 왼쪽눈에 최루탄이 박혀있다.)

4월 11일
마산사건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사건은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진출처:한국외대 학보사)

(맨 처음 궐기한 고려대 학생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경무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귀교하는 도중 종로5가에서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 깡패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4월 19일

(다음 자료는 당시의 사진들이다.)


 

 

 

 


                             (시위 학생을 구타하는 경찰.)

 

 

 


                                                      (시위대를 저지하는 경찰.)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경찰과 대치중인 시위대.)
          (경찰서 앞에 모인 시위대를 가로막는 사복경찰들과 담벽뒤에 잠복중인 정복경찰.)

 


                                               (경찰서 앞에 운집한 학생들)



 



                                          (학생들의 시위 광경.)


 
                                  (시위 저지를 위해 출동하는 무장경찰.)






      


     
                             (죄없는 죄인들........(무자비하게 연행되는 시위대))



                           (부상당한 중학생을 병원으로........)




                                       (항의하는 학생들.)




                                   (질주하는 시위 학생들.)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경찰.)


       
                                             (화염에 휩싸인 시위 현장.)



                        (소방차로 물을 뿌리며 전진하는 경찰.(물대포))


      
                                (경찰의 사격에 무차별 놀란 시위대.)




                          (삼엄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찰.)



                       (성난 시위대가 휩쓸고 지나간 파출소.)
(불타는 서울신문사. 당시 서울신문은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를 일제가 빼앗아 만든 기관지 매일신문을 계승한

매국찌라시로 그들의 왜곡보도에 분도한 시민들에 의해 4.19때 자주 습격당하곤 하였다.)



                                  (하수관을 굴리며 전진하는 시위대.)



                                        (쫓기는 진압경찰.)



                         (이기붕 사저의 가재도구들을 파괴하는 시위대.)

 

    
                            (사기를 잃고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경찰.)

                                    




                                                (초등학생들의 시위)

(출처:다음 모 블로그)


뽀나스로 다음은 당시 한 초등학생이 쓴 시.

나는 알아요 

강명희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은
달음박질 소리다 들려 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놀은
오빠와 언니들의
피로 물들었어요.
오빠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된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군의 죽음의 관련자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후 귀가하는 학생들에 대하여 광화문 앞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저지를 당해, 수십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이승만의 제1공화국 시절, 소위 '부부통령' 이라 불리던 권력의 제3인자,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직위 경무감, 현재의 대통령 경호실장)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막았으나, 곡사포는 무너졌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시위대는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방화하였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화문에 탱크를 진주시켰다. 이기붕은 이미 자신의 자택을 빠져 나와, 서울에서 떨어진 양주로 피신하였고, 계엄 사령관 김종원은 강력히 막으라는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학생들을 돕는다.

 

4월 19일 이후

(4월 20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들. 이미 이때의 구호는 "이승만 퇴진하라."로 바뀐 상태이다.)

(이승만의 '똘마니'였던 이기붕은 결국 일가족이 모두 자살하는 비극을 맞는다. 이게 바로 사필귀정이 아닌가 싶다.)

               (이미 주인없는 이기붕의 집을 불태우는 분노한 시위대. 얼마나 자유당 독재가 가혹했으면.....)

 



                                 (대표적인 정치깡패 이정재의 집도 방화를 면할 수는 없었다.)

 


            
(4.25 시국선언 발표 후 거리행진을 하고 있는 교수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문구가 달린 플랜카드를 들고 있다.)

"이번 4.19 참사는 우리 학생 운동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요, 이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 중대 사태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규정이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로써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이 대통령은 즉각 물러나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살인귀를 처단하라."

(4.25 전국 대학교수 특별 시국선언문)

계엄령
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5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6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결국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이승만의 하야 방송이 발표되자 환호하는 시민들.)
(계엄군의 탱크를 뒤덮은 시민들.)

(한국 현대사의 패륜아이자 최초의 독재자였던 이승만은 결국 5월 29일 하와이로 튀고, 1965년 7월 19일,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결국 사형당한 최초 발포자 곽형주.)

  

(4월 혁명 이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국민호도용으로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들을 유재광을

제외하고 모두 사형시킨다. 다음 사진은 대표적인 정치깡패 이정재가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라는  플랜카드가 걸린 채 도심을 활보하는 장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정재.)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자유당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오후 4시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이승만은 1960년 5월에 그가 청년시기를 보낸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사망자

 

(4.19 합동위령제에서 통곡하는 유가족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의 경찰의 발포등으로 당일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평가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이승만의 퇴진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출처:여러 블로그 및 카페...)

오늘의 짤림방지는 CBS 시사자키에서 김용민씨가 남긴 명언으로 대체....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일 시사자키 진행을 맡은 김용민입니다.

갑자기 이 대통령 생각이 납니다.

이 대통령은 교회 장롭니다.

이 대통령은 대표적인 친미주의자입니다.

이 대통령은 친일파와 손 잡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정적을 정치적 타살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을 자극해 결국 도발하도록 조장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사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야당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정치는 날마다 꼬였습니다.

이 대통령 주변에는 아첨꾼들로 들끓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니까 경찰을 앞세워서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그러다가 권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 대통령은 해외로 망명하더니 그곳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맡게 됩니다.

이 대통령은 결국 국민들의 외면으로 국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쓸쓸하게 세상과 작별하게 됩니다.
.
.
.
.
.
.
.
.

여기서 말하는 이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현재까지는..."
(출처:CBS)

참고(수구쥐벼룩 여러분들께 드리는 글.):
이 글을 포함한 모든 이 천민놈 글은 무단복사 및 펌질+조작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만약 제 글이 문제가 된다면 언제든지 국정원에(안기부 아니었든가?) 전화하세요.
적어도 3천만원은 받으실 겁니다. 뭐 운 좋으시면 이 천민놈 평생 감방에 보내고 1억5천도
받으실 겁니다. 전화번호는 국번없이 111.(참고로 개짭새는 113입니다.)
그리고 제 글에 대한 상담은 천민놈 블로그로 와서 상담하시길.
(1차:blog.hani.co.kr/os21cccc
 2차:blog.daum.net/os21cccc
 3차(본진):mbout-os21cccc.tistory.com)

뽀나스로, 필자의 글이 문제가 있으면 알아서 삭제하거나 수정조치 하겠습니다.

(참고로 다시 말하지만 이 글에는 절대로 '저작권'이 없'읍'니다. 이 글은 철저히 copyleft를 지향합니다.)


쥐박이 쉒기는 1%만의 대통령이다.
99%의 국민은 안중에 없고친일매국노 짓에 정신없다.
용산학살을 자행하고도 여론을 조작하고 
국민 복지는 관심 없이 쥐 일족 밥그릇 챙기는 것만 열중이다.
경제 위기 극복 능력 없이 국민 탓만하고 있다.
쥐박이의 무능을 홍보 부족으로 착각하고 방송을 장악하려고 시도하고 
한반도를 대운하로 토막 내려 한다.
서민 복지 예산 대폭 축소하고 콜센터 이미지 마케팅에만 열중한다.
쥐박이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면 무식한 알밥들을 풀어 유신 시절의 반공이데올로기를 부추긴다.
국가 비전의 제시없이 기도만 하면 되는줄 아는 무뇌충 개.독이다.
그런 쥐쉒이를 따르는 쓰레기가 서너명있다

 

영상실록 - 1961 5.16 .avi (29:29)

http://www.youtube.com/watch?v=CtZQGCa-p2Y&feature=player_detailpage

 

 

영상실록 - 1962.avi (28:36)

http://www.youtube.com/watch?v=s_guMaAKpe8&feature=player_detailpage

 

 

영상실록 광복후 근현대사 스페셜 1963 (28:36)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8TnEs5IIU4

 

 

영상실록 - 1964 6.3 시위.avi (27:53)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SywU0Kuv3E

 

 

영상실록 - 1965년 월남파병 외.. 여러 사건들. (28:03)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cHjkkBj3Yho

 

 

영상실록 - 1978 1979 (39:47)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8kh-14guA4

 

 

1960년 4.19일 그날의 모습을 영상으로 되새기며 가신 님들의 명복과 부상당하신 분들과 유가족들의 안부를 묻습니다.

 

 

 

  •  
// //

 

 

출처 : 유권소
글쓴이 : 이문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