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0/23일 가정리 의암유적과 주일당 답사기[11/29일 사진첨가하고 수정하였음]
[아래는 지난 10월답사로 가정리 일대를 답사한 내용이나 성재선생의 홍무벽 암각자를 비롯한
'니산구곡'을 재답사한 뒤 정리하기로 미뤄오다가 재답사가 늦어져 먼저 답사한 내용 위주로
답사기를 올립니다]
시내 답사를 마치고 수동리고개를 넘어 남산면으로 들어온 일행은 남면과 남산면의 유적을 둘러보는 일정 전에 먼저 구구리 두부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침 한희민 회원이 동네분과 함께 동참하여 인원은 18명으로 늘어났다.
창촌리-방곡리-강촌리로 이어지는 일대는 바일이라고 불리는 동네로 이곳 도로는 삼악산(三岳山) 남쪽 사면의 위용이 가장 잘 보이는 길이다.
일정이 많은 관계로 습재 이소응(1852-1930년)의 생가터나 남산면도서관 구내에 있는 기념비는
차 안에서만 바라보며 지나갔다. 소주고개를 넘노라니 경춘고속도로 강촌나들목길 공사가
한창이었다. 황골을 지나 홍천강이 나오고 가정리 유인석묘역 앞에 당도하니 이미 2시가 다
되어갔다. 미리 연락한 유연훈 선생이 나와서 안내판 앞에서 간단한 해설을 듣고 묘역과
기념관 등을 둘러보았다.
유선생의 간단한 설명대로 묘역이 정비되고 기념관을 세운 것은 1996년부터의 '유적지 조성사업'으로 66억여 원이 들어가 2004년에 완성되었다. 그 뒤에도 정자를 세우고 올해도 수련관 준공식이 있었다. 의암선생께서 1915년 요녕성 관전현 방취구에서 돌아가신 뒤, 1935년 4월 25일(음력 3월 10일)에 이곳으로 반장하여 모셨고 그날을 전후하여 이곳에서는 춘천문화원 주최로 의암제가 매년 시행되고 있다.
묘역 입구 오른편으로는 기념 조형물을 세워 의암선생의 일대기와 어록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누구나 알듯 의암선생은 1895년 호좌의진의 을미의병장이었고 1910년 5월에는 연해주(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하시어 13도의군도총재로서 만년까지 의병장을 지낸 분이시니, 의병하면 떠오르는 대명사 격의 위인이다. 조선 말기의 혼란한 시국에 날로 일본과 러시아에 의존을 더해가던 정국의 위태로움에 엄중한 경고를 하며 목숨을 던져 나라와 집안의 안위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재야의 선비들뿐이었다. 지금은 교과서나 간단한 우리 역사서에서도 당시 의병이 있었음을 단 몇 줄로 소개하며 독립운동을 태동케 한 세력이라 언급하는데 그치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은 결코 있어서는 아니 될 잘못된 설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개화론자의 대표자라 할 유길준 같은 인물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일제의 침략성을 알아차렸을 정도였고, 매양 강조해 마지 않는 <독립신문>에서도 의병은 한갓 '비도'라 불리며 잘못된 무리로 시종일관 기사거리로나 오르내렸으니 말이다. 대한제국이 되며 고종이 '광무'연호를 쓰는 황제가 되었지만, 이는 당시 중앙이 아닌 지방의 숱한 선비들에게는 쉬 납득되지도 않는 일이기 일쑤였다. 하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며 '영력'(永曆:명 마지막 왕인 영명왕의 연호) 연호를 쓰던 화서학파의 선비들에겐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며 이해의 폭을 넓혀 우리의 역사 인식에 긴장의 끈을 당겨야만, 당시 요동치던 망국의 날들에 불굴의 정신으로 맞서던 선현들의 족적이 보는 이의 마음에 하나하나 제대로 담길 것이다. 이 묘역과 가정리 일대를 찾은 이유도 바로 그런 점에 있는 것이다.
의암은 1842년 1월 27일 가정리 여의내(愚溪)에서 태어났고 14세 때 부친 유중곤을 떠나 족숙인 유중선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그해에 양근(양평) 벽계의 화서 이항로 문하에 입문하였다. 관례 때의 주빈은 중암 김평묵(1819-1891년)이었고 족숙으로 화서의 제자였던 성재 유중교(1832-1893년)에게 주로 배웠다. 의암선생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될 당시 문하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복합상소를 올려 왜와의 강화를 반대하며 정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1881년 신사 척사상소 때는 중암선생이 귀양을 가고 성재선생도 사헌부지평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의 학파내 일들을 함께 겪었다. 이런 학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따라 중암과 성재의 서사(書社)는 설악에서 가평으로 옮겨 갔고, 성재선생은 다시 가평에서 가정리로 옮겨왔으며 의암도 1884년 가정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성재선생이 1889년 제천 장담으로 옮겨가기까지의 가정서사는 한국사상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구심점이자 선비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나라에서는 이미 서구열강과 잇따라 조약을 맺으며 천주당이 서울 한복판에 세워지고 서양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던 반면, 가정서사의 선비들은 전통적으로 공부해온 성리학의 근본 사상을 재확인하며 그 요체로 자신을 다잡아 나갔기 때문이다. 거기엔 면면히 이어져온 사림(士林)의 도학정신이 큰 맥락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그런 바탕에서 1890년대 의병(義兵)의 거의가 되었던 것이다.
성재선생이 제천으로 옮긴 뒤 가정서사는 항와 유중악(1843-1909년), 직헌 이진응(1847-1895년), 습재 이소응(1852-1930년)과 더불어 의암선생이 이끌었고, 성재의 타계 뒤에는 의암선생도 1895년 5월 제천으로 옮겨가셨다. 그리고 그해 12월 춘천에서는 습재선생이, 제천에서는 의암선생이 호좌의진의 의병장이 되셨다. 습재선생의 말마따나 제천이 먼저였으나 관찰사를 포살함으로써 떨치기는 춘천이 더했다. 습재선생도 1896년 1월 의암의 의진에 합류하였고 제천은 한때 의병들의 해방구처럼 기세를 떨쳤다. 하지만 2월 아관파천이 있고 난 뒤 고종은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의암은 5월 정선에서 선유공작을 비판하며 의병의 대의를 재천명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서북행을 계속하며 국내에서의 의병의 거점을 마련하기가 곤란하자 7월 초산에서 백관들에게 격문을 보내며 압록강을 건너 '북천지계(北遷之計)'로 요동 행의(行義)에 나섰다. 1897년 8월 광무황제로부터 귀국하라는 글을 받고 가정리로 돌아와 10월 모친의 대상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암은 1898년 1월 다시 2차 요동행의에 들어갔고, 이때는 여러 선비들이 합류하였다. 통화현 팔왕동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활동하였으나 의화단의 난으로 1900년 귀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암선생은 1900년대 초반을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돌며 서북지방에 의병의 근거지를 만드는 노력을 부단히 지속하였고 수많은 선비들이 평안도 개천이나 평양 기자묘, 황해도 평산 등지에 모였다. 이 유적들은 북한에 있고 아직 자세한 연구도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의암선생의 이런 활동은 춘원 이광수가 해방 뒤 발표한 소설 <나·스무살고개>에서도 그 영향의 편린이 담길 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필자의 올 8월 GBN 제5강좌 참조).
선생은 1906년 가정리로 돌아오셨다. 곡운구곡과 관서를 오가다가 가정서사로 돌아와 '만세사(萬世祠)'를 세웠고 가정리 앞 홍천강 일대에 <니산구곡>을 정하셨다. 하지만 면암 최익현의 부음이 전해지고 이듬해에 탄압이 가해질 조짐이 있자 1907년 6월 가정리를 떠나야 하였고 생전에는 다시 돌아오시지 못하셨다.
일행은 사당인 의열사로 올라가 영정 앞에 분향하고 묵념하였다. 재정비한 묘소의 비석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쓴 "유명조선국"이란 말이 있다. 명나라에 있는 조선국이란 말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유지한 말이기는 하지만, 당시 개화당 측에서 내세웠던 '문명개화'가 아닌, 500년 조선왕조가 이어온 우리 고유의 것으로서의 '소중화(小中華)' 문명임을 천명하는 자존의식이 담겨 있다. 우리는 흔히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황제국이 되었고 독립문과 함께 자주국이 되었으며 애국계몽운동으로 몽매한 백성들이 다 '민주'라든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의 지금 국민들은 참으로 행복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몇 년 전 선생께서 74세의 풍찬노숙 끝에 마지막 눈을 감으셨던 요동의 그 산골에 가본 적이 있다. 거기엔 사진과 같은 표석 하나만 세워져 있었다.
[위는 2007년 의병마을해외항일유적탐사로 다녀온 사진임. 시계방향으로 보면 방취구로 가기 전 강과 나루터이며 사진
왼쪽 건너편의 산골짜기 안으로 올라가야 의암이 사셨던 곳이 나오고 그 길가에 1990년대에 그 지역에서 시멘트로 세운
표석이 있습니다. 매년 찾아가 그곳 평정산 의암선생기념원에서 제를 올리고 있으며, 거기서 원경으로 바라보이는 완만한
동네 뒷동산 가운데 나무 있는 곳 근처가 의암선생이 먼저 묻히셨던 난천자란 곳입니다.]
내려오는 길가엔 빨간 단풍이 한창이다. 너무도 새빨개 10월 춘천시보 <봄내>의 표지에도 그 단풍 사진이 실렸다!
기념관 옆에는 백범 김구의 <고유문비>가 있고 그 앞에는 1946년 직접 찾아와 절하는 사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백범이 자신을 비롯한 그간의 독립운동이 선생에게서 나왔음을 천명하고 고한 친필 글씨다. 나이 드신 분들의 전언으로는 백범이 다녀갈 때 가정국민학교 마당에서 연설도 하였다고 한다.
기념관은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바로 주일당(主一堂)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기념관에 볼거리가 너무 빈약한 점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의암유물에 대해서 예산을 책정하고 이곳에 비치하여 여기에 와야 볼 수 있는 볼거리를 서둘러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직도 시중에 나도는 유물이 보이는데도 대책 없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또 한가지, 기념관 내에 화서학파의 계보도를 그려놓고 '기호학파'를 연원으로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특히 기호학파의 임헌회나 전우와 '위정척사'의 논의로 중암, 성재 때부터 선비의 출처문제로 논쟁하며 대의(大義)가 갈렸던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표현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이 논쟁의 기준은 '신불출즉언불출(身不出則言不出:몸이 출사하지 않았으면 말도 내놓지 않는다)'이란 말이었는데, 기호학파가 학파의 '법문(法門)'으로 간주한 반면 화서학파에서는 이를 국가의 위난 시에는 '사법(死法)'일 뿐이라고 언명하였다.]
주일당은 가정리 입구 좌측에 길에서 조금 떨어져 위치한다. 매양 지나치다가 오늘에야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새로지어 성재선생의 영정과 세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춘추 제향의 역할을 할 뿐이지만 원래 주일당은 가정서사의 정당(正堂)이었다. 입구에 고흥유씨 문중에서 2005년 세운 안내표석이 있고 안마당에도 1989년에 세운 <주일당중건기적비>가 있다. 영정을 봉안한 년도가 표석에는 광무6년(1902년)이라 하였고 기적비에는 계묘(1903년)로 서로 다르게 적혀 있다. 1979년 유림의 논의로 문생인 의암, 항와 선생들을 봉안하였고 2001년에 백범의 위패도 봉안하였다고 적혔다.[확인해보니 성재연보에는 1902년이라고 되어 있다. 기적비는 의암의 중수기가 1903년이므로 그렇게 적었을 것이다.]
성재영정은 사후인 1894년에야 그려서 봉안하였다고 한다. 화사는 조기환(趙基煥)으로 연보에는 병고가 없었을 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병세가 위급해진 모습만 보고 그려 실제모습에 만족할 만큼 닮게 그려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오른편 벽에는 의암의 1903년 <주일당중수기> 현판이 걸려 있고 왼편에는 1905년 오완근의 <주일당상량문> 현판이 걸려 있다. 의암은 여기서 성재선생을 "위연히 천하의 종사가 되셨다(蔚然爲天下宗師)"고 하면서 "그 시변처의(時變處義)와 존양위척(尊攘衛斥)을 회상하면 공자·주자 선생님들과 우암(송시열)·화서 옹의 대의를 계승함이 있으셨다"고 하였다. 그런 선생님을 모신 곳이니만큼 의관의 바름(衣冠之正)을 보전하고 강상의 중함(綱常之重)을 실천함이 마땅하고 또 선생님의 영혼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성재선생의 그런 언행은 전국의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가정리가 재야 선비들의 정신적 메카로 여겨지게 하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구의 스승이었던 후조 고석로가 이때 가정리로 와서 공부하였던 사실이다. 또 이번 유연훈 선생의 말로는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도 선생의 제자였다고 하였다.
돌아 나오는 발걸음도 유상을 뵌 기분으로 의암선생의 말처럼 "상서로운 해와 구름이자 광풍제월(瑞日祥雲 光風霽月)" 그대로인 듯하였다. 일행은 다음 답사지인 둔일의 삼층석탑으로 향하였으나, 한희민 선생과 주일당 옛터를 확인하고 가려고 다시 가정리로 들어와 박암리 쪽으로 올라갔다. 두리봉(斗尼峰) 아래 기슭의 길 마루턱 공터가 그 자리였다. 성재선생과 관련해서도 이 원래의 터는 중요한 의미가 있고, 의암선생과 관련해서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지금은 팔려서 무슨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는 상태인 듯하였다. 여기는 특히 중암과 성재선생이 수십 년 집필한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이라는 화서학파의 역사책이 1907년 4월에 간행된 간역소 역할도 하였다. 그 판목은 지금 제천의 자양영당으로 옮겨져 있지만 우리나라 서지학사에서도 가정리는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고흥유씨문중에서 이런 유적들을 먼저 나서서 보존할 수밖에 없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더라도, 장차는 시민과 학계의 관심으로 원래의 모습대로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노력이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가 가정서사/만세사 터였고, 아래 오른편의 봉우리가 두리봉(尼山)이다.
의암선생도 위의 중수기에서 이 터를 두고 이렇게 말하셨다.
"여기서 사방을 둘러보면 홍무벽(洪武壁)과 천근암(天根巖)에 남기신 족적이 의연하게 마멸되지 않고 하늘땅과 나란히 보존되어 있고, 장락산(長樂山) 쌍봉이라는 천추(千秋)의 심월(心月) 또한 완연하게 일대의 앞강을 비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