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 제4대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임기:1960.8~1962.1)
윤보선[Yun Bo-seon]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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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60년 ~ 19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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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이승만(제3대)
후임: 박정희(제5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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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8월 26일 |
사망: | 1990년 7월 18일 |
정당: | 민주당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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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 [1]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1960년 ~ 1962년)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해위(海葦)이다. 1962년 하야 후부터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제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친일파인 윤치호의 종질이다.
생애
1913년 일본 정칙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 게이오의숙 의학부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 귀국해 상하이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생활 3년만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에딘버러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으며, 유학 6년만인 1932년 귀국해 조용히 지냈다. [1] 8·15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숙부 윤치영이나 부친 윤치소와는 달리 친일경력도 없고 영어에 능통한데다가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정치에 투신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2] 이에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직을 지냈고 정부수립 후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3] 1949년에는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1954년에 제3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제4대, 제5대, 제6대 국회에도 진출하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5·16 군사정변 후 1963년 5대,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박정희에 패하였다. 유신독재 치하에서는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박정희 정부시절과는 달리 정부에 적극협력하여 국정자문회의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기타[인물평]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4]
5·16 군사정변에 대한 의혹
군사정변 당시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가족 관계
- 아버지: 윤치소(尹致昭, 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
- 어머니: 이범숙 (李範淑, ? ~ 1969년 6월 18일)
- 아내: 공덕귀(孔德貴, 1911년 4월 21일 ~ 1997년 11월 24일)
- 첫째 아들: 윤상구(尹商求) 건축자재 사업가. 양은선의 남편.
- 둘째 아들: 윤동구(尹同求, 1952년 7월 12일 ~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 첫째 딸: 윤완구(尹琓求, 1913년 12월 31일 ~ 2007년 3월 26일[5], 남흥우의 아내)
- 둘째 딸: 윤완희(尹完嬉)화가. 신준호의 아내.
주요저서
주요저서 《구국(救國)의 가시밭길》
윤보선을 연기한 배우들
기타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 [1]
참고자료
주석
- ↑ 1.0 1.1 1.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77~78쪽.
- ↑ 심지연, 〈민주당 결성과 윤보선의 리더십 연구: 1960년대 초를 중심으로〉,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장면·윤보선·박정희: 196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백산서당, 2001), 106~110쪽.
- ↑ 서울특별시 역대 시장
- ↑ 지동욱, 박윤희 옮김, 《한국 대통령 8인 비극적 말로의 비밀》(사람의향기,2003) 74쪽.
- ↑ “남흥우(고려대 명예교수)씨 상배 외”, 《기호일보》, 2007년 3월 27일. 2007년 10월 30일 확인.
전 임 허정 (권한 대행) |
1960년 8월 ~ 1962년 1월 | 후 임 박정희 |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전 임 김형민 |
제2대 서울 시장 1948년 12월 15일 ~ 1949년 6월 5일 |
후 임 이기붕 |
전 임 임영신 |
제2대 상공부장관 1949년 6월 6일 ~ 1950년 5월 9일 |
후 임 김훈 |
전 임 (종로구 갑)박순천 (종로구 을)오하영 |
제3대 국회의원(종로구 갑)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민주국민당 (종로구 을: 김두한) |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
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김두한 |
제4대 민의원(종로구 갑)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민주당 (종로구 을: 한근조) |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
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
제5대 민의원(종로구 갑)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종로구 을: 한근조) |
후 임 (종로구)전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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²사퇴 †승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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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 윤보선 · 백낙준 · 이인 · 김홍일 · 유진오 · 정일형 · 정화암 |
독립투사 | 김재호 · 안재환 · 유석현 |
제헌의원 | 진헌식 · 송진백 · 황호현 |
가톨릭 | 윤형중 · 함세웅 · 신형봉 · 김택암 · 안충석 · 양홍 · 이창복 · 박상래 |
개신교 | 김재준 · 함석헌 · 강신명 · 강원룡 · 김관석 · 윤반웅 · 조향록 · 이상린 · 박창균 · 강기철 · 계훈제 |
불교 | 법정 |
학계 | 이희승 · 정석해 · 이동화 · 전경연 · 박봉근 · 서남동 · 문동환 · 안병무 |
문인 | 이헌구 · 김정한 · 박연희 · 김규동 · 백낙청 · 고은 · 김윤수 · 김병걸 · 홍사중 |
언론인 | 천관우 · 리영희 · 장용학 · 김용구 · 부완혁 · 임재경 |
법조인 | 이병린 · 홍성우 · 황인철 · 한승헌 · 박경규 |
여성계 | 이태영 · 공덕귀 · 이우정 · 김정례 |
정치인 | 김영삼 · 양일도 · 안필수 · 고흥문 · 윤제술 · 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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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기소 | 문익환 · 함세웅 · 김대중 · 문동환 · 이문영 · 서남동 · 안병무 · 신현봉 · 이해동 · 윤반웅 · 문정현 | ||||||
불구속 기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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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브리태니커
1897. 8. 26 충남 아산~1990. 7. 18 서울. 정치가, 제4대 대통령.
호는 해위(海葦).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로 옮겼지만,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20세 되던 해에 독립운동을 위해 여운형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오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최연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21년 6월 영국 유학길에 올라 1930년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8·15해방이 될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