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추억의 오솔길ㅡ신당동과 떡볶이
추억의 오솔길은 걸어도 걸어도 막다름이 없다.
서리서리 실타래 얽히듯 엮여 있으니 발길닿아 밟히는 곳 마다 그때 그 곳이요
손짓하면 나오느니 그때 그 이야기다.
서울의 허구많은 문들 중에 신당동에 있는 광희문처럼 씁씁한 곳이 없다.
도성안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거적에 덮어 운반하거나 상여(喪輿)를 밖으로 통과 시켰다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했으니 이름만 들어도 으스스 하지 않은가.
헌데 문 이름은 생뚱맞게도 광희문ㅡ'밝고 빛나는 광명의 문'이라니....
머리 좋은 본 거사가 가만히 생각해 본 즉슨,
당시 이 문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화장터 가는 '아리랑고개'가 있었고 그 고개를 넘으면
악다구니같은 이승을 영원히 떠나 서방정토 극락으로 가는 것이니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아니한가?...
해서 이름을 그리 지었다는 것....그럴듯 하요?
신당동이라는 지명이 원래 죽은자들의 명복을 비는 무당들이 많이 살던 신당골(神堂谷)이라는데서
유래된 것만 보아도 영혼이 광명을 찾아 넘는 이 문을 저리 이름붙인거이 일리 있다는 결론이지.험~
옛날 아버지는 강릉읍내 장날이면 그동안 사용해서 뼈무든 호미나 낫 등 쟁기들을 모아 대장간에
들고 가서 새것처럼 벼루어 오신곤 했다.
지금이야 시골에서도 대장간은 거의 찾을수 없지만 허~ 21세기 대명천지에 한양땅에 풀무질 소리가
들리고 뚜땅~퉁땅~쇠를 벼르는 망치질 소리가 들리는 대장간이 두채나 있다는 사실.
80년대만 해도 신당동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대장간이 10여개나 모여있는 대장간거리가 있었다.
광희문에서 신당역쪽으로 조금가면 세곳, 길 건너편에 보이는 한양공고와 성동여자실업고사이에
여섯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없어져 버리고 오직 광희문 조금 못미쳐 이곳에 있는 두곳만 명맥이 남아있다.
궁금한것은 그 노른자위 땅에다 저런 대장간을 세워 운영하는것이 과연 집세나 제대로 낼수 있겠는가다.
설마 그 무슨 '옛것 보존' 운운 때문에 억지춘향격인 전시행정은 아닐까.
1951년 설립된 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양공고는 한양대재단의 유서깊은 명문공고다.
한때 이곳 신당동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사업을 했었는데 당시에도 한양공고는 전국각지의
공고생들이 실습을 하기 위해서 시도때도 없이 학교를 찾곤 하던 것이 기억난다.
사람들은 신당동 하면 광희문을 얘기하면 몰라도 아~ 한양공고 있는데~하면 알아 들었다.
70년대 초, 지금의 중앙체육원(당시는 성동체육관) 바로 옆 중앙빌딩 3층에 검은띠로 동여맨
도복을 둘러 메고 처음 도장을 들어 섰을때의 그 희열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넓은 도장 앞에는 대만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계양되어 있고 그 양옆 가대(架臺)에는 검,도,
창,봉,구.칠절편, 청룡도, 표창....등 낯선 병기들이 나란히 꽃혀 있었다.
각각 붉은 도복과 검은 도복을 입은 수련생들이 호흡소리 하나 내지 않은채 마치 물이 흐르듯
유유하게 권(拳)을 쳐내고 각(脚)을 뻗는 그때의 그 신비롭기까지 한 광경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나의 뇌리 깊숙히 각인되어 있다.
대한십팔기협회 청죽도장(靑竹道場)ㅡ
대만에서 건너온 소림권(少林拳)의 일대권사(一大拳師) 양노사(梁老師)의 수제자인 사부
최관장을 만난것도, 평생의 무술지기요 사형이기도 한 김부연 대일무관(大一武館) 관장을
만난것도 그곳이였다.
맨 처음 수련을 시작한 소호연권(少虎燕拳)의 그 오묘하고 기이한 초식에 홀려서 밤낮을 잊고 몰두했었다.
연이어 금강권(金鋼拳),매화권(梅花拳),당랑권(螳螂拳),적요권(適要拳) 등 .....
무려 40여가지의 권법과 검법.봉술,창술,도술 등 ...각종 무기술.
그리고 밤을 잊은 철사장(鐵沙掌) 연마 ㅡ
지나간 수십년의 18기수련은 이렇게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였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참으로 무술을 좋아했고 또 끈기있게 파고 들었다.
환갑이 될때까지도 그 힘든 무술을 하루 2시간씩 도장에 나가 수련했으니.....
10여년만에 와본 신당사거리도 많이 변모했다.
눈앞을 턱 가로막은 빌딩들 때문에 예전의 기억들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어디가 어딘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데타 계획을 세웠고, 박근혜씨가 아버지 사후 청와대에서 나와 머무른
신당동 자택이 어디 쯤이더라.
70년대 전 국민을 흥분케 했던 프로레슬러 김일의 집,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첫사업인 쌀도매업을
시작하던 경일상회가 있었던 곳은 또 어디쯤이고.
춘장과 당면 사리를 듬뿍 넣고 얇게 썬 양배추를 올려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어묵과
떡,만두,라면을 차례로 넣어 익힌다.
손님의 입맛에 따라 햄, 참치, 오징어 등을 넣어 각각 독특한 맛을 낸다.
신당동 떡볶이는 이렇게 하여 또 하나의 독자적인 트랜드를 형성했다.
한창 전성기때인 90년도 중반기에는 30개가 넘는 떡볶이집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기억된다.
신당사거리에서 왕십리방향으로 올라 오면 중부소방서가 있고, 조금 더 걸어오면 골목대로길
저편에 떡볶이타운이 보인다.
1970년대 라디오광고에 '즉석떡볶이'로 선전이 되던 신당동 떡볶이는 맨 처음 학고방촌에서
시작되어 연탄불에서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고 당시 한그릇에 350원인가 했던걸로 기억된다.
단순히 고추장과 간장 섞은 것에 사카린을 넣어 만든 양념장에 떡을 썰어 넣어 만들었던 떡볶이는
차츰 진화되어 자장떡볶이, 카레떡볶이, 치즈떡볶이, 해물떡볶이, 잡채떡볶이..........
그 종류와 모양새도 헤아릴수 없이 가지각색인 떡볶이타운 100M길을 형성했다.
신당동 떡볶이의 '원조1호집'은 뭐니 뭐니 해도,
TV 광고에서 '떡볶이 양념의 맛은 며누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라는 광고를 유행어로 탄생시킨
'마복림 할머니집'을 꼽는다.
그렇다면 최초의 떡볶이는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1953년 6.25 전쟁의 상흔이 많이 남아 있던 어느날, 마복림 할머니는 가족들과 서울의 어느 중국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당에서 떡을 먹고 있던 할머니는 순간 한국 양념 즉, 고추장을 떡과 같이 요리하면 뭔가
굉장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밀가루 떡에 그녀만의 비밀소스 고추장과 야채를 섞어서 작은
노점에서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고 있는 떡볶이의 탄생이며,
그 후로 이 음식은 '거리음식'에 새로운 시대를 만들게 된다
원체 유명한 탓인지 '마복림 할머니의 막내 아들네'라는 집도 생겼다.
어머니의 비법을 물려 받았다면 당연히 그 맛 역시 일품일듯.
마복림 할머니는 작년 12월 노환으로 향년 91세에 별세했다.
80년도 그 시절 '아이러브 신당동'의 구석진 좌석에 앉아 떡볶이를 시켜놓고 조그마한 종이에
신청곡을 써서 DJ박스에 밀어 넣은 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보면 드디어 매력적인 저음의
사연멘트와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들.
그녀는 비틀즈의 Yester Day와 제시카의 Good Bye, 빌리죠의 Honesty에 열광했고,
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그리고 김수철의
'젊은 그대'를 사랑했다.
신당동 DJ'허리케인 박'ㅡ 박두규씨.
30년이 훨신 지난 지금 아이러브의 문을 밀치고 들어서서 물었다.
"지금도 신청곡을 틀어 주나요?"
"그럼요"
"허리케인 박씨는 지금도 여기 사장님이신가요?"
"그럼요"
추억과 음악 그리고 원조 떡뽂이의 아련한 맛속에 빠지고 싶으면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DJ DOC 이
부른 '허리케인 박'을 들을 수 있는 아이로브 신당동 집을 찾으라.
데이트 비용이야 떡볶이 2인분 12,000원이면 족할 것이고...
예전 떡뽂이 가게에서는 떡볶이만 팔았다.
그러나 눈치빠르면 절에 가서도 젖갈 얻어 먹는다고 퇴근 후 직원들과 어울려 가게앞에 들어서면
미리 점수 따 놓은 주인은 한눈을 찡긋하며 손수레 저 밑에서 소주한병을 슬쩍 꺼내 잔과 함께
내어 주기 마련이다.
달콤하고 쫄깃한 떡뽂이 한점에 갈증 난 목젖을 타고 넘는 술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였다.
그러나 이건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
'삼대할먼네 집'에서 처음 닭발을 팔기 시작하면서 술안주로 인정받기 시작하자 떡볶이집에서도
너도 나도 술을 팔기 시작했다.
그래도 순대나 계란탕 정도의 안주만 추가로 만들고 주 메뉴는 당연 떡볶이였다.
수많은 추억의 오솔길중에서도 어느것은 기억에 남고 어느것은 기억에서 사라지는 법은 없다.
조금만 시선을 집중한다면 아른 아른 안개처럼 그때 그것들은 되살아 피어 오를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흘렀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우리네 존재일뿐이다.
어느날 거리 한곳에 내 그림자를 밟으며 서서 아주 오래전 당신이 걷고 사색하던 것들을 곱다시
되새겨 보노라면 더욱 존재의 상실에 대한 확연성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자조할것은 없다.
어차피 내가 없어지면 내 추억도 함께 소멸될 것이니까.
모든것은 원래부터 '없음'에서 이루어 졌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