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9/13일 광복회 주관의 가정리 합동위령제!

천안한화빙그레 2013. 9. 25. 17:34

 소나기가 내리는 가운데 9/13일 가정리 주일당 곁에서 조촐한 행사가 있었다.

아래는 주일당 모습 -

플랑카드에는 춘천의병이라 쓰고 다시 '합동' 위령제라고 했다! 뭔 소린지 모를 말이었으나 나중에 보니

인근 읍들에서도 의병 후손들이 초청되어 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세운 '충의 발원비'라는 것도 사실 성격이 애매한 것이었는데, 위령제 식전에 제막식

절차를 넣어서 제대로 제막을 했으니 일단 거기 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알려진 셈이었다. 하지만 왜

굳이 이날, 여기서 제를 지내야 했을까? 계속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광복회나 의암학회 등 여러

어르신들과 학계의 원로 선생님들이 논의해온 대로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일 테지만, 이번 행사

에서는 그간의 문제점들이 드러나 보이는 듯하였다.

의병과 관련하여 춘천에서 행해진 행사들을 되돌아보면 우선 처음에는 의암제를 의암의 반장일에 맞춰

지내며 여러 순절한 의병 열사들을 함께 제사지냈었다. 그러던 것이 의암 묘역이 정비되면서 의암제는

의암만을 제사지내고 나머지 열사들은 항일열사들의 추모탑(현재 중도)에서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여기에 의암 관련 사업으로 가정리 일대의 의미가 계속 높아지면서 '충의 발원지'니 '충의 벨트'와 같은

말들이 나왔다. 화서학파의 학자 선비들로서 의병의 창의에 나섰으니 그 충과 의의 정신을 높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가정리가 이런 의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음도 주지의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각

에서는 이에 따라 가정리 일대를 사적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정리가, 그리고 춘천이 충의정신의 발원지란 것은 자기 주장을 해서 정해진다기보다는 주변의

남들까지도 수긍하도록 그런 행적을 밝히고 알리며 보존함을 통해서 인정을 받아야만 그 정당성과 합당

함이 제대로 갖춰질 것이다.

또한 그간 가정리에서는 고흥류씨 문중에서 가정서사의 후대 건물인 주일당의 제향을 유지해오며 관리

해왔다. 당연히 성재 유중교 선생이 주위(主位)이고 거기에 항와 유중악, 의암 유인석이 함께 배향되었

는데 70년대에 중수하면서는 백범 김구의 신위를 추가하였다. 백범 선생이 성재 선생에게 배운 황해도

의 후조 고석로 문하에서 나와 국난의 시기에 임시정부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란 점은 누구

나 아는 바이나, 그 신위를 주일당에 모셔서 제향을 올리는 것이 옳으냐의 문제는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유적의 보존과 제향 문제, 그리고 독립열사의 추모 문제가 함께 섞여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그간은 고흥류씨 문중과 그 후손인 유연익, 유연승 님들의 노력에 의해서 다 도맡다시피 담당돼

오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애초 성재 선생이 1880년대에 가평에서 가정리로 와서 가정서사를 열면서부터 정작 당사자들은 제천

으로, 만주땅으로 옮겨다니시다가 돌아가셨다.  일본의 패망 뒤에 이분들의 후손이나 유물들은 대거

제천으로 갔다. 성재 선생이 제천으로 간 이후 의암이나 습재 선생과 같은 주요 제자들과 그 후손

들이 제천으로 가서 묘소를 관리하고 자양영당을 건립했는가 하면 근래에는 제천의병사료관이 세워

지면서 유물들이 모였다. 그간 춘천에서는 의암학회가 활동하면서 의암의 위상을 제고해왔고 또

춘천의병의 의병장을 지냈던 습재 선생 가문의 의병장들에 대해서도 습재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춘천의병도 새로이 제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이제까지 의암 선생이나 윤희순 여사를 비롯하여 동상이

세워지고 묘역이나 기념관이 세워졌는가 하면, 습재 선생의 경우엔 의병장 공적비와 시비가 겨우 세워

졌다. 이제 의병은 유명 인물 중심으로만 조명하는 데서 나아가 수많은 당시의 참가자들 전체를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행사에서도 아직 의병 위령탑은 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추도의 의례가 이렇게 진척돼온 것도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가정리가 의병정신의 발원지임을 선양하는 데에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때 그 중심에

성재 선생의 가정서사가 있었음을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인다. 대한제국 때 을사보호조약 전후

부터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의암이나 습재 선생의 복잡했던 고민들이 담긴 유적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런 사적 중심의 생각에서 그 중심은 단연코 가정서사의 전통인 것이다. 을미 춘천의병이 있고

나서 의병활동을 했던 습재의 가문은 춘천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당시의 사정 아래서 피폐

해졌던 가정서사가 고흥류씨 문중의 노력으로 원래의 터를 옮겨 현재의 주일당 자리로 가면서 가정

서사의 당명이었던 '주일당'만을 새로이 중수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의암 선생이 자세한 중수기를 써서

남겼다. 하지만 의암과 습재 선생은 이때 가정리에 '만세사'라는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선비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만들려는 구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해외 망명으로 비록 이런 구상이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이 와중에 습재 선생은 제천에서 제천의병의 기반 위에 이런 구상을 자양영당의 건립으로

성사시켜 나갔던 것이다.

춘천에 남겨진 의병 유적은 그래서 주일당뿐이었지만, 전국적인 차원에서 의병의 사적을 돌아본다면

그 뿌리가 되는 가정서사의 역사적인 의미를 빼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일당이라는 결과만

놓고 보면 당연히 그것은 성재 선생이나 의암 선생, 항와 선생 등 고흥류씨의 사당임이 맞다. 그런 문중

사당에서 백범과 같은 대표적인 독립운동 인사를 모신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춘천의병의

사적이라는 점에서 주일당을 보면 그 전신인 가정서사를 같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춘천시에서

의병 유적으로서 주일당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가정서사를 주목해야 한다. 그간 가정서사가 지녔던

1880년대의 위상을 나는 "당시 재야 유림의 정신적 메카"와 마찬가지로 중요하였다고 정리한 바 있었다.

당시는 이미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로 과거 조선시대와 같은 서원의 위상을 지니지는 못한 가정서사

였다고 해도, 의병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이런 점을 부각시키지 않고는 한낫 제천과 춘천이라는

지역간의 우열 비교, 문중간의 낯가림이라는 관행들을 벗아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억수로 내리는 우중에도 춘천의 의병아리랑 공연이 있었다.

행사에서는 도시락을 나눠주었으나 빗속에 먹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정재억 회장님과 오동철 사무국장 및 한희민 간사함께 제천서 오신 이영식 등 습재가 종손님을 모시고 강촌설렁탕 집으로 갔다.

허준구 사무국장과 원영환 문화원장님도 자리를 함께 하여 이번 행사와 주일당의 습재 제향 문제를

두고 의견들을 들었다.

습재의 전주이씨 문중에서는 미리 알려드린 문제라 의견이 정리되어 있었다. 백범 신위를 주일당에

모신 것은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아 보이며 잘못돼 보인다는 것이었다. 원장님한테도 가정리의 사적 지정

생각을 들으며 가정서사 터와 그 복원 문제를 말씀드렸다. 또한 제향 문제를 앞으로는 고흥류씨 문중이

아니라 이제 유관 시민사회단체들에서 맡아 진척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좋은 생각이라

여겨졌다.

출처 : 춘천역사문화연구회
글쓴이 : 一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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