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 사람은 고인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그 존재감마저 희미하지만, 김대중과 김영삼 두 명의 정치가가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성격과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 고 장준하 선생의 추모 서예전이 서울의 한 화랑에서 열렸을 때, 여러 국회의원들이 앞다투어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 중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쓴 작품도 있었습니다. 김영삼은 대도무문(大道無門), 김대중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글귀를 썼지요. 사자성어지만, 글귀에서 두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김영삼은 '용기', 김대중은 '지혜'라고나 할까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스타일은 우선 일하는 모습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김영삼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직함이 없이, 그냥 비서라는 이름으로 계보사무실을 운영했습니다. 반면, 김대중은 비서라는 이름만으로는 모자라, 보좌역에 전문위원이라는 별도의 직함까지 따로 붙여 활동하게 했습니다.
김영삼은 상도동에 사무실을 두었고, 김대중은 동교동에 사무실을 두었습니다. 상도동에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합심해서 처리하는 반면, 동교동에서는 일마다 따로 담당을 두고 보고서를 작성해서 처리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김영삼의 상도동은 말로 일을 하고, 김대중의 동교동은 글로 일을 한 것이죠.
사무실 분위기도 김영삼의 삼도동은 시골 장터 같이 약간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화기애애함을 연출했는데 반해, 김대중의 동교동은 엄숙하면서도 질서정연했습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지요.
(비서를 부를 때)
김영삼: "덕용아!" "원종아!" "학로야!"
김대중: "권 비서, 김 차장, 배 위원."
김영삼은 비서나 참모들에게 직함을 부르지 않고 저렇게 친근하게 직접 이름을 불렀으며, 직접 커피를 타주는 정겨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 김대중은 결코 비서나 참모들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제나 직함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화가 났을 때는 이상하게도 존댓말을 쓰면서 보고서로 얘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물론 비서들에게 커피를 타주는 일은 없었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김영삼의 심복이던 김동영은 김영삼과 사소한 일로 말싸움을 벌였었죠.
김영삼: "야! 왜 그 따위로 일을 했어?"
김동영: "내 나이가 몇인데, 큰 소리입니까?"
김영삼: "뭐? 이 자식이!"
다음날, 김영삼은 김동영을 불러 어제 일을 사과하면서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김대중의 동교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의 비서들은 보스에게 저렇게 대들지도 못하고, 물론 김대중 본인도 저렇게 비서들한테 역정을 내거나 막말을 하지도 않았죠.
또, 설날에 비서들이 세배를 하려고 해도 김영삼은 자기가 먼저 일어나 악수를 청하고, 절도 못하게 하며 회의를 할 때도 누구나 자유롭게 대화를 하도록 유도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하지만, 김대중은 격식을 존중해서 비서들과도 거리감을 어느 정도 두는 식이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김영삼은 인간적인 교감을 우선시 했는데 반해, 김대중은 합리적인 절차를 중시했습니다. 얼핏 보면 김대중 쪽이 더 좋아 보이지만, 막상 정치 생활을 하면서 김영삼의 참모들은 거의 대부분이 끝까지 그를 따랐는데 반해, 김대중의 참모들 중에는 그에게서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차가운 이성보다는 따뜻한 감성을 더 좋아했던 것일까요?
김영삼이 "감성"을 중시했다면 김대중은 "이성"을 중시했습니다. 그 예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김영삼은 자기편 사람들의 개인 사정도 확실히 챙겼는데,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자기가 자주 가는 호텔 직원의 결혼식 날짜를 알고 축의금을 주었으며, 지방 대의원 자녀가 결혼할 때는 반드시 참석해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촌지를 줄 때에도 김영삼은 한 번에 100~200만원의 현찰이 든 지갑을 그냥 통째로 던져주면서 "어이, 김기자! 요새 수고가 많재? 이거 그냥 지갑째 갖고 가서 후배들 술이나 사주그라!"하고 '통 큰 인심'을 팍팍 썼습니다.
이러다 보니 김영삼은 군사 정권 시절에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그의 휘하 사람들이 좀처럼 배신이나 이탈을 하지 않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런 이유로 김영삼의 인맥 관리 능력은 타고 났다고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물론 김영삼에게도 큰 결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식과 말솜씨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김영삼은 우선 이십대 중반에 국회의원을 하고, 그 이후로 줄곧 야당 대표로서 대 정부 투쟁에만 골몰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거나 지식을 쌓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김영삼은 본인의 무지로 인한 말실수를 많이 해서(예: 전술핵과 원자로를 헷갈린다든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몰라 차씨라고 한다든가 등) 자주 비웃음을 사기 일쑤였는데, 본인도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인지,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라고 호언장담하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을 한 번 만나고 온 사람들은 이내 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김영삼은 본인의 말솜씨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상대방과 만나면 자기는 별로 말하지 않고 대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영삼과 만난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김영삼에게 가르친 것 같은 뿌뜻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반면 김대중은 모든 면에서 김영삼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우선, 김대중은 평생에 걸쳐 2만 권의 책을 읽었다고 자부할 만큼, 풍부한 지식을 쌓은 것으로 유명했고, 또 이런 자신의 능력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김대중은 영어와 일본어를 스스로의 힘으로 독파했으며, 철학과 경제 방면에도 상당한 지식을 지녀, 웬만한 기자나 전문가들과 토론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건 사족이지만, "김영삼이 읽은 책의 권수보다 김대중이 쓴 책의 권수가 더 많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김영삼이 오죽이나 책을 안 읽었으면, 그리고 김대중이 얼마나 독서가였으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그런데 오히려 이런 점이 김대중의 대인 관계에서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김대중은 머리 좋은 것 이상으로 논리적이다 못해 거의 까칠할 지경이어서, 그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그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가르치려 한다는 일종의 불편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개중에는 김대중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지요.
또, 김대중은 굉장한 달변가여서 한 번 말문을 열면 거의 몇 시간 동안이나 혼자서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쏟아내는데, 김영삼이 상대방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거북하면 "씰데없는 소리!"라고 일갈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런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정치적 동지이자 경쟁자였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로를 평가해 달라는 말에 둘은 이렇게 대답했지요.
김영삼: "내가 김대중 씨를 존경하는 것은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는데도 좌절하지 않고, 이 시점까지 용기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참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 탄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견뎌온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김대중: "김영삼 씨에 대해서 높이 평가할 부분이 참 많지만, 내가 볼 때 그 하나는 용기라고 생각해요. 원내총무할 때도 보면 그렇고, 야당 당수를 지낼 때도 보면 그렇고 단식할 때도 보면 그렇고, 보통 용기를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거든요. 영국의 처칠 수상도 말했지만, 모든 미덕 중에서 용기가 으뜸이라고 했는데, 나도 거기에 동감하지만, 김영삼 씨는 다른 야당 지도자에 비해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있어요.
둘째로 그분은 정치의 흐름을 빨리 파악하는 그런 센스가 굉장히 발달해 있어요. 대게 그 감각이 틀리지 않아요. 방향을 잘 잡아요. 그런 점에 있어서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직관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때로는 이론이 직관을 뒤따라갈 때가 많아요.
셋째로 그분의 정치 성향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일관해서 굽히지 않거든요.
넷째로 그분이 포용력이랄까, 사람을 많이 끌어 모으는 힘이 있어요. 이런 점으로 봐서 정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몇 년전, 위키리스크에서 공개한 김영삼과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김영삼이 먼저 대통령이 되어서, 하나회 해체나 금용실명제 전격 실시 같은 어려운 일들을 과감하게 단행한 것을 두고 절묘한 일이었다고 평가했었죠. 확실히 김대중이라면 아무래도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는 통에 김영삼보다 추진력과 용기 면에서 부족하기는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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