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몽준대표 부인 김영명 "살수록 남편에게 후한 점수" | ||||||||||||||||||
◆ 女세상의 중심
자신의 학창생활, 가족 이야기, 남편인 정몽준 대표 이야기, 시아버지인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추억, 미래의 꿈 등등… 김 여사는 처음에 자신을 `평범한 주부`로 소개했다. 기자도 그런줄 알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여당 대표의 부인, 4남매를 키운 엄마, 전통문화를 위해 뛰는 문화인, 자신의 꿈도 펼쳐가는 `커리어 우먼`으로서 한마디로 여장부였다.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고, 여자는 남자를 지배한다`는 속담이 어찌 그리 잘 들어맞는지… 대문을 나서면서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를 소개할 때 `김영명 여사의 남편 정몽준`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대화를 줄이고 압축했는데도 원고지로 67장이나 됐다. 핵심만 소개해도 지면이 너무 부족한게 안타까웠다. ■ 학창시절부터 결혼까지 -외교관인 선친(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을 따라 해외 생활이 길었는데 어린시절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게 어떤지 ▶6남매중 막내여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요. 아버님은 엄한 분이셨는데, 막내라 그런지 나한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줄곧 해외생활을 했지만 사실 유학을 간 건 아니잖아요. 외교관인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익히며 자랐으니까. 해외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다는 느낌은 없었어요. 단지 일본 미국 등 여러나라에 머물다 보니 영어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고 일본어 스페인어도 배우게 되고. 부모님이 주신 어떤 특혜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 여기저기서 외국어가 유창하다고 소문이 무성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아요. ▶(고개를 흔들며) 영어는 그런데 다른 외국어는 그렇지도 않아요. 사실 일본어는 배우는 과정이 특이해요. 선친을 따라 일본에서 3년 가량 살았지요. 그때 심장수술을 받는 바람에 학교를 안다니고 2년간 집에만 있었어요. 집에 있으니 TV만 봤지요. 옛날 영화도 보고...그렇게 일어를 배웠어요. 그래서 말은 좀 하는데, 글을 잘 못써요. 영어는 아버지가 주미대사 하시던 시절 배웠구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미국에서 나오니 영어는 나름 유창한데 일어는 많이 잊었어요. 다만 어려서 말을 배운 덕분인지 발음은 일본 사람 비슷하다는 얘기는 들어요. 스페인어는 내세울만큼 별로 잘하는 수준은 아니예요. 제2 외국어로 배웠는데 많이 잊어버렸고. 애아빠는 영어 외에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후회된데요. 국제축구연맹(FIFA) 활동때도 그렇고. 가끔 스페인어를 배울껄 하는 얘기를 해요. -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것으로 나와있는 걸 보고 일부에선 남편인 정몽준 대표의 내조를 담당하는 역할로 제격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가 본인이 정치에 뛰어든 힐러리 클린턴이 다녔던 웰즐리대를 나왔고. ▶정치학이 전공이라는 게 사실 조금 우스워요. 사실 꼭 정치학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구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원래 미대를 가고 싶었어요. 워싱턴 D.C에서 여고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미대에 가는 것을 꿈꿨지요. 그런데 처음부터 미대를 가면 혹시 시야가 좁아질까 싶어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미술을 공부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웰즐리 대학에 미대는 없고, 미술사가 유명했어요. 그래서 `에이, 경제학이 유행이니 경제학 해야지`라는 마음에 경제학을 하려고 했지요. 그 때가 1974년인데 경제학이 인기가 있었거든요. 당시 했던 생각이 `미술을 직업으로 삼으면 가난해지겠지`하는 것도 있었지요.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통계 이런거 들어보니 정말 어려웠어요. 성적도 잘 안나오고...그래서 정치학 과목을 여러개 들었어요. 심리학도 교양과목으로 들었고. 당시 미국에선 8과목만 이수하면 그게 전공이 됐지요. 역사학과 정치학 과목을 가장 많이 들었는데, 역사학은 조금 모자랐고 정치학쪽 과목은 더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전공이 된 것 뿐이지요. 이런 스토리를 모르시는 분들은 남편이 정치를 하니 저도 정치학을 했나, 이렇게 생각하시더군요. 그때는 정몽준 대표를 만나기도 전인데. 사실 대학 때 정치학을 했다고 하면 조금 부끄럽고, 인문학 계열을 했다고 하는게 더 맞을 것도 같아요. - 정몽준 대표를 만난 얘기도 해달라 ▶언니 소개로 졸업을 1학기 남기고 만났지요. 언니가 6살 위인데 애아빠 형수님과 아는 사이여서… 이집에 처녀 있고, 저 집에 총각 있으니 만나보면 어떻겠느냐 해서 만났어요. 서울의 호텔 커피숍이었어요 - 첫눈에 반했다거나,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나 ▶전혀(웃음). 방학 때 만난 거였고 개학하면 다시 미국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큰 기대는 안했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벼락이 치고, 이런 건 없었지요.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느낌은 좋았던 것 같아요. 방학때 거의 매일 애 아빠가 만나러 왔으니까. 밥도 먹고 테니스도 치면서 데이트를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애 아빠는 저를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웃음).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졌나. ▶애아빠 만났을 때가 아버지가 외교부 특보로 계셨을 때 였어요. 그때 언니 오빠들은 다 공부하러 가고, 결혼하고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두분만 계셨지요. 막내고 하니 한 학기 정도는 이화여대서 공부하며(일종의 교환학생) 부모님과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아빠와 만난 것도 그때였어요. 그런데 당시 내 여권이 일반여권이어서 3개월 이상 되면 외무부에 신청을 하고 복잡하게 되서 학기말 시험을 못치고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됐지요. 그래서 결국 미국에서 한학기를 더 다녀서 4년 반만에 졸업했지요. 그 때 이미 애아빠랑은 교제를 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1학기 더 다니던 때 애아빠도 MIT 대학원에 다니게 되서 미국에서 사귀었지요. 결국 한국서 조금, 미국서 6개월 정도 만나다가 1년만에 결혼하게 된거라 생각하면 돼요. -정몽준 대표라면 조금 무뚝뚝한 인상도 있는데 데이트하던 시절 에피소드가 있나. ▶내 생일이 9월인데, 그때 장미꽃도 사다주고 그랬어요. `이 남자는 꽃도 사다주는 자상한 남자구나`해서 좋아했었어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나를 생각해준다는 마음에 참 좋아했었지요. 근데 결혼하고 나서는 잘 안해주는 거예요.(웃음) 그러다가 셋째가 중학생이었을 때였나, 결혼한지 20년 정도 됐을 때였어요. 남편한테 `생일 땐 꽃이라도 해줘요`라고 이야기했지요. 그 이야기가 있고 난후 남편이 어디 제가 멀리 다녀오거나 기념일엔 꼭 꽃을 사오더군요. -남편 점수를 매긴다면. 돈 잘 벌고, 인물 좋고, 빠지는 데가 없는데 ▶결혼하고 나서 문화적 차이가 많이 나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결혼 후 너무 힘들었지요. 특히 신혼초엔 더 그랬고. 보통은 신혼때 점수가 후하고 결혼하고 점수가 박해진다는데 나는 그 반대인 것 같아요. 지금 오히려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어요. 30년을 살고 보니 우리 애아빠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남자를 어디서 만나겠어요.(모두 끄덕끄덕) - 신혼초기 문화적 차이 때문에 힘들었다는 부분을 더 얘기하자면 ▶우리 집만 해도 해외생활도 오래 한 집이예요. 딸도 많고. 그래서 식구들끼리 수다도 많이 떨고 그랬어요. 그런데 애 아빠 집은 아들이 많은 집이잖아요. 약간 군대식으로 서열도 있었고(웃음). 그런점이 나쁘다기보다는 너무 달라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고향도 애아빠는 원래 강원도고, 저희는 경상도고. 신혼여행도 참 멋없이 갔어요. 7월28일에 결혼식 이후 아버님(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신입사원 환영회 하시던 설악산에 잠깐 들러서 인사드렸어요. 그리고 경주에 가서 하룻밤 묵고, 다음에 울산 조선소 견학을 하고. 적응이 안됐어요. 결혼하기 전엔 사실 현대중공업에 대해 잘 몰랐는데 막상 조선소를 신혼여행지로 가보니 참 갑갑하게 느껴졌지요. 당시에는 조선소 일거리가 많지 않아 밤에도 깜깜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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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가의 며느리, 4남매의 엄마 -나름대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다소 엄한 현대집안으로 간 느낌은 ▶잘 알겠지만 현대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버님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잖아요. 처음엔 내가 워낙 아침잠이 많아서 그게 힘들었어요. 학교 다닐때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으니까. 그런데 집안 분들은 전부 일찍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는 거예요. 새벽에 밖은 깜깜한데 모두 모여 아침도 드시고. 그게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지요. 친정집에선 막내여서 어리광도 부리고 귀여움도 받았는데, 시집와선 그걸 받아줄 사람도 없구요.(웃음) -며느리 김영명이 생각하는 시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은 ▶가장으로서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요. 우리 애들이 크면서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엄마, 아빠로서의 역할이 쉽지 않잖아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손에서 자라지만, 사실 크면서 점점 멀어지고 말도 안듣고. 그런데 아버님은 자식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새벽에 자식들 모아서 식사하고 출근하고. 이게 당시 우리는 우리가 힘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버님이 더 힘드셨을 거예요. (자식 키워보니) 이제야 그걸 깨닫고 있지요. 지금 우리 애들 모아서 밥이라도 먹고, 아빠와 아침 먹으라고 하면 하겠어요? 애들도 바쁘다고 하면서 따라주지도 않을 것이고. -정 명예회장은 매우 딱딱하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그릇이 굉장히 크면서도 섬세했어요. 현대그룹을 경영하면서 집안 살림도 다 챙기고 놓치는게 없었지요. 명절때는 집안일 도와주는 아줌마 아저씨들까지 일일이 챙기셨어요. 또 주변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더 감성지수가 높은 분이었지요. 한번은 가을을 맞아 낙엽이 집앞 출근길에 수북히 쌓였어요. 당연히 일하시는 분들이 깨끗이 치우려고 하잖아요. 그랬더니 아버님이 `낙엽이 떨어지는 데로 밟고 나갈테니 치우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사각사각 밟는 소리가 좋다고. 그 때 내심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시아버지가 매우 예뻐했던 며느리라고 들었는데. ▶사실 미국에서 공부한 며느리라고 처음엔 많이 탐탁해하시진 않았던 것 같아요. 당시엔 여자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그런 시절이 아니었잖아요. 전통적인 집안에선 당연히 안 좋아했으니까. 한국에서 여대 나오고 곱게 큰 색시를 더 좋아하던 시절이었지요. 아버님은 그래도 굉장히 자상하게 대해주셨지요. (시간이 바빠)대화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서열도 낮았고(웃음). 애기 가졌을 때는 용돈도 주시고 그러셨어요. 내가 첫 애를 낳고 참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외국서 살고, 언니 오빠들이 애키우는 것도 못봤고 그래서요. 애가 재채기하면 환절기니까 그런건데 그냥 애한테 이불 계속 덮어주고, 그러면 땀띠가 나고...그래서 시댁으로 헐레벌떡 애 업고 뛰어오고 그랬었지요. 그런 허물(?)도 다 이해해주던 시아버지였지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아이를 넷씩이나 낳았는데. 부부금슬이 좋으셨다고 보입니다. 부럽기도 하고. ▶그러게 말이예요. 사실 저희보다 나이가 많으신 세대에서 아이를 넷 낳는게 신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우리 시대로 오니 넷을 낳으면 눈총을 받는 분위기가 된 거예요. 당시에는 `하나 낳아서 잘 키우자` 그런 시대였고. 넷째 임신하고 초음파 검사하러 가면 의사가 `아들이 없어서 그러냐`고 물어보곤 했지요. (정 대표는 첫째가 아들이다) 그래서 당시엔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임신사실도 숨기고 그랬어요. 이제 13년이 지나고 나니 `애국자`가 됐어요. 역시 멀리 내다봐야지요(웃음) 정부에서 애 낳으면 돈도 주고 하니 참 신기하지요. 사실 막내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막내와 큰애간에 14살이나 차이가 나고, 셋째와도 10살 차이가 나지요. - 애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는지 ▶일부러 더 유별나게 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가장 평범하게 아이들이 자라주길 바랬지요. 그런데 잘 안되더군요. 애들이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애아빠보다 할아버지가 너무 유명해서 참 힘들어했어요. 사실 일부러 아버님(정주영 명예회장) 이야기를 학교에 하지 않고 숨기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큰아들이 초등학교때였나, 신문에 아버님 시리즈가 나온거예요. 교과서에 울산 조선소도 나오고...그러다 보니 그냥 다 알게 됐지요. 그래서 평범하게 자라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 아이들이 아빠가, 할아버지가 유명인이어서 힘들어하진 않았나. ▶첫째딸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사춘기도 심했고. 큰아들은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딸은 그렇지 못했어요. 아이에게 미안한 게, 압구정동 살다가 딸이 초등학교 6학년때 강북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것도 가장 예민한 시기, 친구가 필요한 시기에 전학을 시킨 거지요. 남들은 강북에서 강남으로 간다는데 말이예요. 그때는 별 생각없이 애아빠한테 맞춰서 했는데 지금은 참 후회가 돼요. 애가 학교 적응에 너무 힘들어했거든요. 또 그 때가 인터넷이 막 붐을 일으키기 시작하던 때였지요. 우리야 인터넷을 잘 못하고 그랬지만 아이는 많이 하면서 아빠에 대한 여러 기사와 소문을 보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나름 상처를 입었던 것도 같고. 특히 애아빠가 대한축구협회 회장할 때 안티(반대)세력도 많고 욕도 많이 먹었던 때라 아이가 더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대표팀이 져도 회장으로 욕먹고, 대표팀의 경기력이 나빠도 매도당하고. 그래서 아빠 이야기 하는 것도 너무 싫어했고, 특히 아빠가 정치인이라는 것도 싫어했어요. 그러던게 크니까 다행스럽게도 되돌아왔어요. 애아빠가 2008년 울산에서 지역구를 옮겨서 동작구에 선거에 나갔을 때예요. 당시 딸이 처음으로 아빠 선거운동을 도와주더군요. 공천을 너무 늦게 받아서 선거가 딱 3주인가 남을 만큼 힘든 시기였고, 지역을 다 돌기도 버거운 상황이었지요. 몸이 2개라도 모자랄 판인데 딸이 같이 경로당도 돌아주고 해서 큰 도움이 됐어요. 애가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 같고. 그때 뭉클했지요. ■ 정치인 정몽준의 아내 -아이들도 그렇지만 남편이 정치인이라는 게 참 쉽지 않았을텐데. ▶그야 당연하지요. 사실 남편이 처음 정치한다고 할땐 이해가 안갔어요. 아버지가 외교관이신 관계로 어머니가 하루 걸러 손님 치르는게 일이었어요. 우리 식구들은 부엌에서 따로 밥먹고. 그러다보니 사실 공직에 있는 사람하고 결혼하기 싫었지요. 남편하고 만났을 때는 사업가 집안 사람이라 좋아했던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결혼하고 몇년 있다가 출마를 해버리는 거예요.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어린이날만해도 사실 우리 아이를 챙겨주고 싶지만, 국회의원은 지역구에서 행사를 다니며 다른 아이들을 봐줘야 하잖아요. 저도 애들도 따라가고. 몇번이나 `왜 이렇게 해야 하나`는 회의도 들었어요. 가족중 누군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가족으로서는 큰 희생이다. 특히 아이들한테는 그랬지요.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는가. ▶아무래도 첫 선거때인 1988년 같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요. 울산에 오래 있었고 현대중공업도 있으니 쉽게 되지 않았냐고. 근데 그렇지 않아요. 당시에는 현대중공업 노사분규가 너무 심각해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상황이었어요. 애아빠가 유세를 하면 돌이 날아오고 계란이 날아와 방탄방패가 등장했을 정도였으니까. 처음에는 워낙 지역구 주민중에 현대중공업 분들이 많으셔서 제일 먼저 회사쪽으로 혼자 인사를 갔었어요. 그런데 인사를 드렸더니 몇몇 분들이 `왜 왔냐` `왜 이제서야 와 인사를 하냐`며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당시 애기를 안고 갔고, 큰 애도 6살이었는데. 저도 30대 초반이구요. 사실 (사회경험이 거의 없는) 애잖아요. 눈물이 났지만 거기서 울수는 없어서 꾹 참았어요. 그분들께 `늦게와서 죄송합니다. 시작은 늦었지만 앞으도 대신 자주 오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화장실로 가서 펑펑 울어버렸어요. (이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처음도 그랬지만 정 대표님이 2002년 대선 당시 더 힘들지 않았나.(2002년 대선때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표가 노무현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고 후보단일화를 이뤄냈다가 대선 바로 전날밤 지지를 철회했다) ▶그때도 참 힘들었어요. 애아빠가 철회 선언을 할 때 옆에 있었는데...그냥 아빠가 어려운 결정을 내렸으니 뜻에 순종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다른 분들이 보실 때는 너무 급하게 즉흥적으로 결정했고, 성급한게 한 것이라고 해서 참 욕을 많이 먹었어요. 하지만 옆에서 본 바로는 많이 생각하고 결정하신 것이었지요. 단일화 이후 정책적인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고 내렸는데. 전날 즉흥적으로 결정했다고 오해하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어요. 노무현 후보님이 대통령에 당선되신 후, 사실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외로웠어요. 대한민국에 있기 어려울 정도로. (이 대목에서 김영명 여사는 눈물을 살짝 내비쳤다) -정몽준 대표는 지금도 그 부분에 언급하는 걸 꺼리는데 ▶그 과정에서 사실 국민들에게 많이 죄송하고, 그런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다만 애아빠 입장에선 그냥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몰론 지지철회를 안하고 같이 가면 어땠을까, 자기소신이 희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을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여론을 의식해서 주변환경을 보고 그냥 물 흐르듯이 가면 더 편했겠지만, 그게 자기 자신에겐 용납되지 않았던 거예요. 자기한테는 거짓말이 되니까. 그걸 지켜서 나름 내 남편이지만 자랑스러워요. 물론 어려움은 매우 많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시고 나서 한동안 애아빠는 등산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얼굴이 다 알려지니 모자나 선글라스도 소용 없대요. 다 알아보고 손가락질 하니. 세상이 우릴 버린 것만 같았어요. -그러고 보면 정치인생이 나름 험난했던 것 같은데 ▶2002년 당시 식구들이 많이 힘들었지요. 하지만 애아빠만큼 힘들었겠어요. 결혼한지 30년쯤 되보니 애아빠를 이해하겠어요. 돌이켜보면 결혼한지 30년이 지나니 조금 성숙해져서 그런지 이해를 하겠어요. 본인은 워낙 받은게 많으니까,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고 싶은 마음같은 게 있잖아요. 전에는 마지못해서 따라 갔는데 특히 지역구를 동작구로 옮기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당시 상황이 힘들었고, 상대(정동영 의원)도 어려운 분이셨고,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애아빠가 (정치인으로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하게 되더군요. -정치인 정몽준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아요. 장단점을 보자면 ▶장점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다는 것이지요. 이건 시아버님께 배운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버님을 생각해서 배우고 따르려고 많이 노력했고, 지금도 그렇고. 단점은 성격이 조금 급한 거지요. 마음이 급하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고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예요. 요건 집안 내력인것 같아요.(웃음) 예전엔 애들하고도 좀 관계가 소원했는데, 나이들면서 더 잘해주고, 잘 안될때는 내 이야기도 들어가며 대화하기도 하고. -정 대표가 시원시원하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주변 사람들에게 잘 못한다는 비난도 있다. 욕먹어야 정치인으로 대성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애들이 중학교때 일일 거예요. 당시 축구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인데 인터넷에서 `협회 회장이 국가대표 훈련센터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글을 본 거예요. 그러면서 아빠는 뭐 하는 거냐고, 반항심을 갖더라구요. 당시 훈련센터를 짓고 있는 중이었는데 말이죠. 또 국가대표가 시합에 지면 물러나라는 댓글이 쏟아지고... 그런 소문이 돌 때마다 참 안타깝지요. 예전에는 매스컴에서 폭력장면을 내보냈는데 그게 애아빠가 관련있는 것처럼 소문이 나서 일일이 설명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어요. 그래도 아직까지 그걸 사실로 믿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심지어 `여자관계도 있다더라`라는 얘기도 들었는데, 저도 듣고 나니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제가 `누구누구 젊은 여성하고 정 대표간에 소문이 있더라`라는 얘기를 듣고, `상대방한테 미안하다. 애아빠 나이가 얼마인데...`라며 웃고 말았어요. -정 대표보다 김 여사께서 오히려 정치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미인에다가 이미지도 더 친근감 있고.(웃음) ▶(손을 내저으며) 에이, 그렇지는 않아요. 사실 애아빠는 정직하고 직설적이라 정치하긴 어려운 스타일 일수도 있어요. 그런데 애아빠를 가까이서 두고 보면 굉장이 정이 가는 스타일이예요. 제가 아는 우리 애아빠를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는데 쉽진 않은 것 같아요. 사업가 집안이고, 부잣집 아들이니까 으레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게 참 속상하지요. 사실 제가 요리를 잘 못하는데 그건 애아빠의 소박한 식사 습관 때문에 그래요. 양식을 먹고 오면 꼭 밥과 김치를 먹는데, 서양요리보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우거지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 물론 김치는 조금 까다로워요. 맛있어야 하고 신김치보다 덜익은 김치를 싱겁게 먹으니까. 계절에 따른 김치도 좋아하고. 봄에는 봄동김치, 여름에는 오이소배기 등... 그래도 지금까지 반찬투정 한 걸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정대표가 한나라당 대표를 맡으면서 다시 대선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부분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답변했다) 애아빠는 맡은 일을 참 열심히 해요. 공약한 건 지키려고 노력하고, 신뢰를 중요시하는 성격이지요. 이제 애아빠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시간이 한정돼있으니 무엇이든 애아빠와 같이 열심히 해주려고 해요. 옛날엔 지원을 잘 못해줬지만, 이젠 정말 잘해주려고 하지요. 결혼 30년차가 되어보니 인생의 마무리가 중요한 것 같고, 우리의 인생 마무리는 우리만을 위해 살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하려고 하지요. 정치지도자이건 여론지도자이건 모범을 보여야하는데, 그 역할을 잘하면 보람이 클 것도 같구요. -정치인으로 워낙 유명하다보니 경영자로서 부각되지 않은듯 한데. 그런데도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올라섰다. ▶(정치처럼 경영에도) 신뢰가 중요한 것 같아요. 회사 분들께서도 믿고 맡기니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는 것 같구요. 애아빠는 본인이 대주주로서 회사의 안정, 특히 회사 일을 맡으신 분들이 일을 잘 할 수 있게끔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해요. 다만 현대가가 워낙 사업을 하는 집안이고, 형제분들도 많고, 축구협회나 정치 일을 많이 하니까 그쪽으로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것 뿐이지요. 실제로 현대중공업 경영에 1981년부터인가 관여했는데... - 정몽준 대표는 후세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지 ▶애아빠는 아마 `애국자`로 남는 걸 제일 좋아할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지 간에 이 사람은 나라를 위해 일을 했다 그런 평가 말이지요. 실제로 월드컵 유치할 때도 욕을 먹었지만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며 밀어 붙였거든요. 상암구장을 지을때도 비용대비 효과가 없을 거란 얘기가 나올 때 나라를 생각해서 지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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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명의 남은 이야기 -남편이나 애들 이야기 말고 개인으로 김영명의 욕심은 없나. ▶일단 아이들이 잘 커주고, 남편이 잘됐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사실 속상한 적도 많이 있었었요. 어디 동문회 가고, 모임 가면 나만 명함이 없으니까요. 예전에 외국에 가서 소개를 하는데 `정몽준 부인`이라고 하고, `가정주부(housewife)`라고 하니 더 이상 대화를 해주지 않는거예요. 약간 이해하지 못할 눈으로 보면서.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정몽준의 아내로서 충분히 행복하니까. 다만 어렸을 때 그림 그리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고 그러고 싶어요.다시 태어나면 화가로 살고 싶고. 나이가 60~70세쯤 되면 전시회 같은 것도 해보고 싶구요. -지금 활동하는 문화재단법인`예올`도 그런 차원인지. ▶예올은 2001년 우리 문화를 제대로 잘 소개하자는 취지로 시작했어요. 엉망인 문화재 영어간판, 잘못된 문화재 소개책자, 헷갈리는 문화재 표지판 등도 바로잡고 문화유산도 적극적으로 지켜보자는 것이었어요. 지금 함께하는 예올 멤버가 전문가가 아닌만큼 우리 문화를 배워가자는 취지도 있었구요. 대신 전문가집단, 교수님들 초빙해서 자문을 받고 디자인도 하고 여러 활동을 해요. 여수엑스포에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고, 작가들도 도와주기로 했지요. 전통공예품도 많이 소개하고 보급하는데 힘을 쓸까 합니다.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면 ▶동작구에서 자전거 동호회를 하자고 했는데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 말만 해놓고 약속을 못 지키고 있어요. 그분들께 매우 죄송해요. 참, 이 참에 친청 어머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어머님 이야긴 사실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말해본 적도 많이 없어서 (웃음. 여기서 본인이 처음에 절대 얘기하지 않던 키를 불쑥 실토했다). 제 키가 175cm인데, 사람들이 너무 크다고 놀려서 주눅이 들었던 적이 많아요. 그런데 저희 어머님은 더 옛날 분인데 키가 저와 비슷했어요. 경남여고 농구센터로 활동도 하셨지요. 당시 부잣집이었고 아버지(김동조 전 장관)는 가난한 학생이었는데, 아버지가 요즘 신세대들이 좋아하는 꽃미남이어서 반했던 것 같아요. 그러한 어머님은 큰키 만큼이나 활동적인 분이셨는데, 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외국 나가셔서도 이래저래 내조를 많이 하셨지요. 제일 대표적인 게 1963년, 아버님이 주일대사로 일본 가셨을 때 일일거예요. 일본 천왕궁에 가셔서 식사를 하셨는데 일본 고유의 문양이 접시마다 새겨져있는 걸 보셨던 것 같아요. 그걸 보시고 어머니가 접시에 태극마크를 넣어서 일일이 주문한 거예요.한국의 문화를 널리 알리고 싶어하셨던 거지요. 그 당시엔 한국 도자기업체들도 제대로 없었을 때라서 일본에서 일일이 다 주문하셨지요. 그리고 공관에 손님들이 올 때마다 그 접시에 음식을 담아서 대접하셨지요. 어머님이 그걸 시작하시고 나서 해외에 나가 있는 대사 부인들도 다 그런 접시를 주문해서 내놓으신걸 봤어요. 난 그게 참 자랑스러워요. 나라를 위한 작은 일이지만 그걸 조용히 실천하셨다는 부분에서 말이지요. 우리 애아빠와 저도 본받고 싶은 부분이지요. ■ She is… 김영명 김영명 여사는 1956년생으로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과 송두만 여사의 2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의 외교관 활동 때문에 혜화초등학교에 다닌지 얼마 안돼 일본·미국 등으로 나가 16년간 해외생활을 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명문여대 중 하나로 꼽히는 웨슬리대에 진학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금의 남편인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를 만나 1년간의 연애 끝에 1979년 7월28일 결혼했다. 정 대표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뒀다. 175cm의 훤칠한 키와 미모,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사교성이 좋아 국제 축구계 인사들과 부인들로부터 `미스 스마일월드컵`이라는 애칭을 얻기도했다. 현재 문화재단법인인 `예올`의 이사로 활동중이다. [김상민 기자 / 박인혜 기자] |
출처 : 정몽준팬까페 정 몽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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