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한국 제14대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1993.2.25~1998.2.24)

천안한화빙그레 2013. 8. 24. 15:13

김영삼 [Kim Young-sam]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김영삼(金泳三, 약칭 YS,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 )은 대한민국정치가이자 제14대 대통령이다. 군사 독재정권 시절 동안 야당 정치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신민당 당수, 통일민주당 총재를 지냈다. 9선 국회의원을 거쳐 대한민국문민정부 제14대 대통령(1993년~1998년)을 역임하였다.

 

김영삼
김영삼

임기: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5일

전임: 노태우(제13대)
후임: 김대중(제15대)

출생: 1927년 12월 20일
정당: 민주자유당
종교: 장로교
배우자: 손명순

생애

학창 시절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김영삼이 서울대학교 졸업 학력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했다. 정식 입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이었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서울대학교에선 정식으로 김영삼의 입학과 졸업을 인정했다. 김영삼의 생가에는 김영삼이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1951년 9월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성적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다.

정치 이력

정치 입문

대학 3학년이던 1950년 창랑 장택상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였고[1] 1952년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2][3] 1954년 5월 대한민국 제3대 총선에서 자유당 후보로 거제에서 출마하여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다. 이후 여당의 독재에 반발하여 자유당을 탈당, 민주당에 입당했고, 1958년대한민국 제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 서구에서 출마해 낙선하나 4.19 혁명 이후에 치뤄진 대한민국 제5대 총선에서 재기한다. 이후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동한다.[4]

국회의원 활동

5대 국회에서는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고, 제3공화국 기간 동안 제1야당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거쳤다.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당수인 유진산을 제치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이철승, 유진산 등과 번갈아가며 신민당 당수를 역임하던 중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었으며,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강제로 제명되고 가택 연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 항쟁을 촉발했고, 이는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제5공화국 정권에서도 계속된 가택 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5]

야당 지도자

1983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였고,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을 하였다. 1984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 올라서자,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였으며, 1987년 다시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6월 항쟁 이후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민주정의당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만 압승을 거뒀을 뿐 수도권 지역에서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패배하면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제2야당의 지위에 불만족을 느끼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내각제 개헌을 노리고 있던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물밑 협상 끝에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고, 김영삼은 민자당의 대표로 취임하였다. 노태우, 김종필과의 3당 합당 과정에는 내각제 이면합의가 있었으나 김영삼은 노태우를 압박하여 이를 백지화하였고, 김윤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쳤으며 일부 민정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고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며, 1992년 5월 18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에 취임하였고[6] 결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된다.

대통령 재임문민정부입니다.

삼당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다.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없애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제5공화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구속 수감되었다. 그해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1994년에는 지방자치제에 관한 법률에 서명해, 1995년 6월 27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같은해 민주자유당이 민주당 일부 통합하여 신한국당을 창당할때 참여하여 신한국당 총재가 되었고(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참고) 1995년 10월 19일 통합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고심 끝에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전격적으로 구속 수감하고, 12.12 쿠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 법정에 세웠다. 이어‘5·18특별법’을 만들어서 국립묘지승격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1996년 12월 프랑스 파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1996년 10월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다.

1997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가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1997년 1월부터 한보 철강, 기아자동차 주식회사 등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으며, 결국 12월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금융 지원을 신청하였다. 199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자행하였는데, 1998년 3월 국가 안전 기획부와 검찰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당시 국가 안전 기획부 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집권 말기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의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고, 외환금융이 악화되어 IMF 구제금융사건로 인해 국제통화기금의 원조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는 아들 현철을 그를 차기 국회의원 이나 정치인 등으로 염두해 두었으나 신한국당의 신임 총재로 취임했던 이회창은 김영삼측의 생각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일로 김영삼이회창 간의 미묘한 감정싸움의 발단이 되어 알력으로 작용하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대통령 퇴임 이후

대통령직 퇴임 후에도 꾸준히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전임자인 박정희·전두환, 후임자인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등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해 오고 있으나,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긍정적이며 호의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제18대 총선 공천에서 자신의 측근이 대거 탈락하자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2002년 4월부터는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1997년 12월 22일 퇴임 직전 전두환·노태우 두 전대통령을 특별사면했다.

2005년 조병옥 박사 45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으며[7] 2007년 12월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나라를 건국한 국부이며,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김구는 이루지 못할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박정희를 역사의 죄인으로 혹평하고 5.16 쿠데타가 없었다면 장면 정부가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며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장면의 민주당 정권에서도 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8] 2008년 5월 라디오 방송 광주MBC 표준FM <시선집중 광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28년의 비망록’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을 비판하였고 5.18 당시의 비극을 회상하였으며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미흡한 것은 아쉽다는 소견을 피력하였다.[9]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의 출마를 놓고 김영삼이회창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때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을 향해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자신의 무능과 잘못으로 두 번씩이나 집권의 기회를 잃게 만든 장본인이 이제는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과 후보에게 비수를 들이대고 있다며 이회창을 공격을 퍼부었다. 반면에 여당의 이명박 공격에 대해 대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고 후보 등록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이 때, 이 정권이 범죄자를 데려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를 겨냥해 검찰수사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여 이명박 후보에게 우호적으로 평가했다.[10]

평가

군사정권 집권시 야당 지도자들 중 첩자·사꾸라 등으로 몰렸거나 부정부패와 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나 좌익등으로 몰렸던 다른 야당 인사들에 비해 청렴하고 깨끗한 처신으로 3공화국과 유신, 제5공화국 기간 동안 잡음이 없었던 점 등 김영삼의 정치적 청렴성, 결백성 등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1983년 5·18 광주 항쟁 3주년 기념식 때, 전두환 정권의 정치탄압에 맞서 23일간 단식투쟁 중 빵과 우유를 먹다가 목사 문익환에게 들켰다는 루머가 돌면서 비판이 일기도 했다. 3당 합당 이후 여당의 일원으로 소속됨으로서 야당성이 희석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긍정적 평가

야당 지도자 활동시 비타협적이었다는 것에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11] 1962년 윤보선 정권 퇴진 이후 31년만의 민간인 대통령으로 문민정권을 수립했다는 점과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군사정권을 종식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집권기간 중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등을 숙청하여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침략의 상징인 조선총독부를 철거하였으며, 거액의 비자금을 획득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을 사법처리하였으며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의 죄도 함께 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둔다. 또, 집권 초 1993년 8월 12일 모든 금융은 실명으로 거래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거래의 투명성을 가져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부정적 평가

구 군사정권과의 야합과 집권기간 중 IMF 외환위기 초래, 재임말기에 발생한 둘째아들 김현철의 권력형 비리사건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전두환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여 단식한 일이 있었다. 목사문익환과 사이가 나빠진 계기에 대해 그가 단식투쟁을 하던 곳에 문익환이 위로의 목적으로 방문을 했는데 마침 그때 김영삼이 보름달빵과 우유를 먹고 있던 걸 목격했다는 주장과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이것에 대해 확인된 것은 없다. 선거제도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이나 군사정권의 후신인 정당과 야합했다는 한계가 있다. 본래 민주 진영의 야당 지도자였으나 3당합당으로 구 여권과 연합하였다는 것에서 일부 민주 진영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리거나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정치적 노선과 유산

김영삼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한 정당으로는 신한국당한나라당이 있다. 김종필·이회창 등 일부 박정희계열 인사들은 일시적으로 민자당과 신한국당에 합류하였으나 김영삼과의 노골적인 경쟁관계에 있다가 탈당하였고 김영삼계열과 노태우전두환의 민주정의당 계열(민정계)이 존재하고 있다. 그의 정치적 노선으로는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주류 파벌을 이루는 민주계 파벌의 종주로 상정된다. 다른 파벌은 노태우전두환의 민주정의당 계열(민정계)를 이룩하였다.(반면에 박정희계통은 김종필의 일시적 합당과, 탈당후 자유민주연합 창당, 김윤환계의 탈당 등으로 한나라당과는 정치적으로 무관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노선의 뿌리로는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를 거쳐 한국민주당에 정치적 기반을 둔다. 자유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자유당 계열의 인사인 국무총리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였으나 1960년 이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민주당에서 활동하였다. 타 정당에서 민주당으로 입당한 인사들은 신파 계열로 건너갔지만 김영삼은 김성수·신익희·조병옥·윤보선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구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유신 체제 하에서 이철승·유진산·유진오·김대중 등과 함께 반박정희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구파 내부의 다른 경쟁자인 이철승과 신파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김대중 등과 정치적 경쟁관계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관계 끝에 김대중1987년 11월 통일민주당(새한민주당의 후신)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통일민주당은 제1야당에서 원내 제3당으로 지위가 하락·축소되었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1987년 6.10 항쟁 이후 민간인 정부의 출범을 원하던 열기를 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노태우는 투표자 중 36.6%의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1990년 민주정의당노태우, 박철언, 신민주공화당김종필 등과 함께 3당 합당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김대중은 3당합당을 야합이라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신념-대도무문(大道無文)

상훈

주요 저서

  • 40대 기수론
  • 회고록
  • 지도자의 길
  • 인생을 뜻있게 보내려면
  •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
  • 나와 조국의 진신

김영삼을 연기한 배우들

가족

같이보기

참고자료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 임
노태우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후 임
김대중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전 임
(통영군 갑)서상호
(통영군 을)이채오
제3대 국회의원(거제군)[14]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무소속
후 임
진석중
전 임
(부산시 서구 갑)이상룡
(부산시 서구 을)김동욱
제5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갑)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부산 서구 을)김동욱
후 임
(부산 서구)김영삼
전 임
(부산 서구 갑)김영삼
(부산 서구 을)김동욱
제6대 국회의원(부산직할시 서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민정당
후 임
김영삼
전 임
'김영삼'
제7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1967년 12월 17일 ~ 1971년 6월 30일
신민당
후 임
김영삼
전 임
'김영삼'
제8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1971년 12월 17일 ~ 1972년 10월 17일
신민당
후 임
(부산 동구·서구)
박찬종,
김영삼
전 임
(동구)김승목
(서구)'김영삼'
제9대 국회의원(부산 동구·서구)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신민당
박찬종
후 임
박찬종,김영삼
전 임
박찬종,'김영삼'
제10대 국회의원(부산 동구·서구)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신민당
박찬종
후 임
(중구·동구·영도구)왕상은,안건일
(서구)곽정출,서석재
전 임
(서구·사하구)
곽정출,서석재
제13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통일민주당
후 임
곽정출

[편집] 주석

  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906010330371750020
  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0448385
  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912186
  4.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0704&num=155
  5.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753a
  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45273
  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912186
  8.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0704&num=155
  9. 김영삼 前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야”
  10. http://www.koreadigitalnews.com/board/view.php?&bbs_id=sub&doc_num=2670
  11. http://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12504§ion=section1
  12. 실제 향년은 99세라는 설이 있다.
  13. 이덕화의 동창이라 한다.
  14. 1953년 1월 1일 통영군 중 장승포읍, 장목면, 둔덕면, 거제면, 사등면, 일운면, 동부면, 하청면, 연초면을 관할로 하여 거제군이 새로 설치됨으로써 신설된 지역구이다. (거제군설치에관한법률(제정 1952년 12월 14일 법률 제271호)

 

출처 : 강서구의원 신창욱과 함께 강서21
글쓴이 : -인동초♥신창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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