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홍성추의 재벌가 인사이드

천안한화빙그레 2014. 8. 1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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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창업자의 연애법칙, 연예인과 바람이 나도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는다

몇 년전 아주 흥미로운 소송이 하나 있었다. 친자 확인과 재산분할 소송이다. 소송을 한 사람은 1960년대와 70년대 은막을 주름잡던 미모의 스타 H씨였고 당사자는 얼마전 타계한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였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H씨와 재벌총수와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재벌 총수와 H씨 사이에는 딸 2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황한 유가족들이 100억원의 현금을 H씨에게 주고 이 소송은 취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H씨가 본명과 자녀 이름으로 소송을 제기해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모르고 지나갔다.

재벌 가족들과 연예인들의 스캔들은 온갖 루머를 양산하며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다. ‘모 총수가 연예인 00에게 백지 수표를 건넸다더라’, ‘00백화점이 연예인 00소유라 하더라’, ‘가수 00가 홍콩에서 어느 총수의 애를 낳았더라’는 식의 얘기들이 증권가 ‘정보지’나 세인들의 단골 메뉴다. 이러한 소문들은 자식이 있으면 H씨처럼 늦게라도 반드시 노출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입소문만 무성하고 그냥 묻히게 되고 만다.

재벌들과 연예인의 구설수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특히 심했다. 당시 재벌들은 정경 유착과 새로운 시장 개척 등으로 한창 양적 팽창을 할 때였다. 이에 맞추어 큰 기업주들은 대부분 서울 성북동이나 한남동, 강남 등 고급 주택단지에 ‘영빈관’이라는 비밀 접대장소를 만들어 놓고 주요 고객을 초대했다. 이런 접대 장소에 여자 연예인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초대자인 총수와의 스캔들로 이어졌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재벌가와 연예인의 관계는 수없이 있어왔지만 결말은 ‘해피엔딩’보다 대부분 불행을 자초했다.

연예인과 재벌 총수와의 만남은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창업주인 경우 혼인 신고를 거의 하지 않는다. 연예인은 숨겨진 여인,즉 첩으로 데리고 있었다. 반면 2, 3세에 이르러서는 초혼이든 재혼이든 정식 부인으로 연예인을 대우해 준다.

후처 연예인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 지난 1977년 미스 롯데로 화려하게 연예계에 대뷔했던 서미경씨다. 서씨는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의 후처로 들어간 뒤 연예계에서 사라졌다. 1988년 서미경씨가 낳은 딸을 신 회장의 호적에 입적하면서야 세상에 드러났다. 그때까지는 후처로 들어앉았다는 소문만 무성했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왼쪽)과 1974년 롯데모델로 활동하던 당시의 서미경 씨.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왼쪽)과 1974년 롯데모델로 활동하던 당시의 서미경 씨.
서씨는 현재 롯데쇼핑 지분을 0.1%(3만531주)나 보유하고 있다. 딸인 유미씨도 롯데쇼핑 0.1%와 롯데삼강 0.33%,코리아세분 주식 1.40%를 보유하고 있다. 미미한 주식 지분율로 보이지만 신 회장이 돌아가고 두 아들인 동주, 동빈 씨가 지분 경쟁을 벌일 때는 케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의미있는 수치다. 이들 형제의 현재 롯데 계열사 지분율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형식상 형인 동주씨가 일본 롯데를, 동생인 동빈씨가 한국 롯데를 맡는 것처럼 돼 있지만 주식 소유는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재벌 총수와 결혼한 이는 1970년대 ‘별들의 고향’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안인숙씨와 60년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던 문희씨, 90년대 모래시계로 유명한 고현정씨다. 재혼으로 정식 아내가 되었던 이는 70년대 최고 스타 정윤희씨와 인기가수 ‘펄시스터즈’ 멤버인 배인순씨이다.

안인숙씨는 대농그룹 박용학 창업주의 아들인 박영일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막을 떠났다. 당시만해도 대농그룹은 섬유와 유통, 기계 업종을 아우르는 국내 굴지의 회사였다. 특히 계열사인 미도파 백화점은 젊은이들의 쇼핑장소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1998년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해 쓰러지고 만다. 그룹이 해체된 뒤 이들 부부는 조용히 교회일에 전념하며 외부 활동을 삼가고 있다.

70년대 최고의 스타였던 정윤희씨는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과 살림을 차렸다. 당시 조 회장은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1984년 간통혐의로 유치장 신세까지 감수하면서 사랑을 쟁취, 오늘에 이르렀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와 완전히 발을 끊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변신했다. 중앙산업은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회사로 초창기만해도 삼성그룹보다 사세가 더 컸었다.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곁에 있는 태평로 빌딩이 원래 중앙산업의 모태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이 빌딩을 사려고 무척 공을 들였으나 팔지 않았다가 IMF 이후 결국 삼성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조규영 전 중앙산업 회장과 배우 정윤희 씨.
조규영 전 중앙산업 회장과 배우 정윤희 씨.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안방마님이었던 배인순씨는 워낙 세간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20여년을 함께 살다가 헤어질 때 폭로전을 하며 구설수를 만들었다. 결혼 직전 최 회장은 동아건설 최준문 창업주의 장남으로 이미 두 번의 결혼 경력이 있는 이혼남이었다. 반면 배인순씨는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고 뉴욕으로 건너가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최 회장이 미국까지 찾아와 끈질기게 구애한 끝에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결혼후 한동안 잉꼬 부부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최 회장은 나중에 미스코리아 출신인 아나운서 장은영씨와 살림을 차렸고 배씨는 최 회장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커피 한잔’이라는 자전 에세이를 발간,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동아그룹 역시 무리한 사업 확장과 내부 관리 잘못으로 모기업인 동아건설이 부실해지면서 최 회장은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된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회장과 배인순 씨.
최원석 전 동아그룹회장과 배인순 씨.
1960년대 톱스타인 문희씨와 한국일보 창업주의 장남인 장강재씨와의 결혼도 장안의 화제였다. 그러나 장 회장이 타계하고 한국일보도 최근 장씨 일가에서 삼화제분 집안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신세계 그룹 정용진 부회장과 미스코리아 출신 톱스타 고현정과의 결혼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1남1녀를 낳고 짧은 결혼 생활을 청산해야 했다. 정 부회장은 그 뒤 한지희씨와 재혼, 지난해 이란성 쌍둥이를 낳으면서 새출발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탤런트 고현정 씨.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탤런트 고현정 씨.
재벌은 아니지만 잘 알려진 기업주와 결혼 했다가 실패한 연예인들도 더러 있다. 이인표 에스콰이어 창업주 3남과 결혼했던 탤런트 황신혜씨와 영화배우 김부선씨의 경우다. 황씨의 남편 이정씨는 한때 패션구두를 생산 판매하는 등 잘나가는 기업가로 활동했지만 기업도 부도가 나고 결혼마저 실패하고 만다. 김부선씨는 극장 재벌로 소문난 단성사 장남인 이주호씨와의 사이에 딸을 하나 뒀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주호씨는 집안에서도 인정 받지 못해 외국을 전전해야 했다. 차남이 운영하던 단성사도 최근 부도를 맞고 말았다.

지난 1990년대 초 잘 나가던 재벌 2세의 몰락을 취재한 적이 있다. 70년대 강남개발로 일약 거부가 된 부친의 후광을 업고 백화점을 운영하는 등 한때 젊은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던 K씨다. 서울대 상대를 나오고 키도 180cm를 넘어 흔히 얘기하는 ‘신언서판’을 다 갖춘 촉망받는 젊은 사업가였다. 그러나 30대 초반에 큰 사업을 하기에는 무리였는지, 마약과 도박 등에 빠져 사업을 멀리했다. 마지막에는 연예인들과 마약 파티를 벌이다 잡혀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함께 마약을 했던 여자 연예인들은 그 뒤 영원히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당시 필자에게 K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철없는 나이에 원하는 것은 모두 할 수 있어서 결국 마약에 손을 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돈이 있으니까 주변에 채홍사 역할을 하는 친구도 있었을게 뻔한 일이다.

이렇듯 재벌가와 연예인의 결합은 그렇게 좋은 결실만은 아니다. 창업주들은 본 부인이 아닌 후처로 대부분 들였고, 2, 3세들은 정식 부인으로 삼았지만 회사가 망하거나 이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재벌가에선 연예인과의 혼사를 그렇게 반기지 않는다. 2, 3세와 혼사가 많을 것 같지만 스캔들로만 이어지는 것은 이와 같은 재벌가의 불문율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주변에선 연예인의 기가 세서 재벌가와의 혼사는 맞지 않다고 얘기한다. 재벌 총수의 부인은 밖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조용히 집안에 머물며 대소사를 처리하는 현모양처형을 요구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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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실패로 끝난 재벌 총수와 정권 실세의 정략 결혼


재벌과 정치의 함수(上)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대통령이 재벌 때문에 정치를 시작하였다면 얼마나 믿을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박 대통령은 재벌 총수가 국회의원직을 반납하면서 생긴 1998년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통해 금배지를 달았고, MB(이명박)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결별하면서 92년 신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박 대통령이 보궐선거에 출마한 대구 달성은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의 지역구였다. 김 회장은 선대 회장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정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7년에 불어닥친 IMF가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자동차 사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 등으로 그룹이 풍전등화에 놓였다. 결국 98년 2월에 국회의원직을 반납, 기업인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 지역구에 박근혜 대통령이 투입된 것이다. 당시 집권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낸 엄삼탁씨를 내세워 TK(대구·경북) 공략에 온 역량을 집중했다. 이에 야당인 신한국당은 박 대통령을 선택, 그 바람을 잠재우는 작전을 펴 승리를 따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의 정치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MB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때문에 어쩌면 어부지리로 국회의원이 된 케이스다. 1992년 초 정 회장은 통일국민당을 창당 할 때 MB에게 동참을 요구했다. 그러나 MB는 거부했다. 대신에 YS(김영삼)가 총재로 있는 민자당 전국구 23번으로 등록, 가까스로 전국구 초선의원이 됐다. YS가 정주영의 바람을 막으려고 그를 전국구 후보로 등록한 것이다. MB가 현대측 제의를 거절한 이유를 당시 필자는 심층적으로 취재했었다. 정 회장 측근들 중 누구하나 MB를 옹호하는 인사가 없었다. 한 공중파 방송에서 MB를 롤 모델로 한 드라마가 히트를 쳐 국민들에게도 ‘영웅’으로 그려져 있는데 의아했다.
대부분 실패로 끝난 재벌 총수와 정권 실세의 정략 결혼
현대그룹과 결별하기 얼마전부터 MB와 정 회장 사이에는 냉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도 통일국민당에선 대중성 있는 그를 서울 종로 지역에 공천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뿌리치고 여당인 신한국당으로 가버렸다. 그 뒤 현대그룹 핵심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MB를 원망했다. 그런데 2007년 대선에 당선되고 집권하자 정 회장 측근으로 분류된 몇몇 인사들이 공기업 수장까지 차고 앉았다. 정치란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적이 된다는 말이 실감났다.

‘재벌 총수와 최고 통치자’. 이 두사람 중 누구 힘이 센가를 가늠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셈법인지 모른다. 1960년대와 70년대, 5공화국인 전두환 정권하에선 흔히 얘기하는 권부 실세마저 총수들을 부하 다루듯 했다. 권위주의정부 시절 재벌 총수들은 권력앞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재벌들은 이를 극복하려고 권력에 기대는 공생의 길을 모색했다. 정권 실세들에게 적당히 뇌물을 주고 혜택 받는 길을 선택하거나 혼맥으로 연결해 ‘가족’을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한화 그룹이 당대의 실력자 이후락씨와 사돈을 맺은 일이나 코오롱그룹이 김종필 전총리 딸과 혼사를 맺은 일이 60, 70년대 대표적인 정략 결혼이다. 5공화국과 6공화국 땐 현직 대통령 가족과 혼사를 맺은 재벌도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현직일 때 딸을 SK그룹 최종현 회장 아들과 아들은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 딸과 결혼시켰다. 전두환 대통령 역시 현직일 때 포스코 박태준 회장의 딸과 아들의 혼사를 성사시켰다. 이들 중 대부분이 이혼, 정략 결혼이 결국은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편에 계속)


재벌과 정치의 함수(下)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이 글로벌화 하면서 총수들이 파워를 갖게 된 것이다. 특히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으로 굳어지자 정치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YS집권 시절인 1995년 4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베이징에서 국내 언론사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정치는 4류’라는 폭탄 발언이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이날 이 회장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은 일류국가가 될 수 없다”면서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 고 정치권에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이에 청와대는 발끈했고 삼성의 신규사업 등에 많은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어쩌면 재력으로 권력까지 넘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지 모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1992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직접 정당을 창당, 정권에 반기를 드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 모험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지만 재벌의 힘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IMF 한파가 몰아치자 재벌들은 다시 위축됐다. 국내 재계 랭킹 3위였던 대우그룹이 몰락했고 30대 그룹에 들었던 유명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 재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정권과 결탁으로 부를 챙기던 시대는 지나고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좌파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총수들은 숨죽일 수 밖에 없었다.

MB 정권이 들어서자 재벌들이 또 한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MB 또한 이들의 생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재벌 총수와 최고 통치자의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증명해준 일화가 2007년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사무실에서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들과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MB와의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는 와병중이라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외국에서 급히 귀국해 참석했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보석으로 풀려난지 얼마 안된 상태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 재벌 총수들에게 권력의 힘이 어떠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메시지였다. 정치인이나 군 출신이었던 전직 대통령과 달리 MB는 전문 경영인 출신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전문 경영인은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오너의 눈밖에 나면 그날로 자리가 없어지는 한시 직장인에 불과하다. MB가 현대건설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이면에는 ‘정주영’이라는 주인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총수와 전문 경영인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1997년 4월 한보철강 비리 사건으로 열렸던 국회 청문회 석상에서 정태수 회장이 ‘머슴이 어떻게 아느냐’고 한 말이다. 전문 경영인을 한마디로 ‘머슴’으로 정의한 내용이었다. 필자가 창업회장을 만났을 때 역시 그랬다. 그들은 보통 전문 경영인을 ‘OO군’이라고 불렀다. 창업주가 대부분 60대 70대 연장자여서인지 ‘OO사장’ 보다 ‘OO군’을 더 좋아했다. 전문 경영인들은 연말 연시 정기 인사에서 유임이냐 퇴임이냐를 매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한다. 그 키는 전적으로 총수만이 쥐고 있다. 실적이나 실력도 중요하지만 정무적인 이유로도 전문 경영인은 옷을 벗어야 한다.

‘머슴’이었던 전문 경영인 출신인 대통령 당선자가 그날 주요그룹 총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등을 두드리는 장면을 연출, 권력의 힘이 총수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예전에는 만나려고 해도 만나주지 않던 재계 총수들이었다.

2007년 12월 28일 낮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초청 경제인 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김승연 한화 회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2007년 12월 28일 낮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초청 경제인 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와 김승연 한화 회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돈이 있으면 권력을 가지려고 정치권을 기웃거렸고 권력을 잡으면 돈을 챙기려고 혈안이었음은 인지상정이나 다름없다. 1960~70년대는 기업 총수가 정치인으로 변신, 정치권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과 코오롱 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이었다.

SK로 애칭됐던 김성곤 회장은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할 정도로 권력과 금력을 함께 틀어쥔 인물이었다. 지난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 개헌을 반대하다 당대의 권력자 김형욱(중앙정보부장을 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나중에 배신,미국에 망명했다가 행방불명됨)에게 밉보여 콧수염을 뽑히는 등의 망신을 받았다. 쌍용그룹은 시멘트·레저·건설·언론사 등을 소유한 국내 굴지의 재벌이었다. 한 때 국내 기업 서열 6위까지 올랐으나 2대인 김석원 회장의 경영실패로 IMF 때 무너지고 말았다.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역시 기업인과 정치인으로 성공한 케이스다. 정치를 할 때 그룹 경영은 동생인 이원천 회장과 장남인 이동찬(현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에게 맡겨 일정부분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아들인 이동찬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과정에 동생인 이원천 회장과 지리한 집안 싸움을 벌이게 된다. 코오롱 그룹 형제와 조카 사이의 분쟁은 우리 기업사에 한획을 긋는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결국 동생인 이원천씨가 레이온이라는 소재 부품 사업을 분사, ‘원진 레이온’으로 독립해 나가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구태회 전 국회부의장도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친 동생이다. 구 부회장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형인 구인회 회장을 도와 화장품을 개발하는 등 깊숙하게 그룹 경영에 관여한다. 그러나 조카인 구자경 회장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정치쪽으로 방향을 틀어 국회부의장까지 올랐다. 지난 2003년 LG그룹이 가족간 재산 분할 때 전선 부문을 물려받아 LS그룹으로 개명하고 현재 2세들이 경영일선에 나서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 중견기업주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이는 정권 차원에서 중견그룹 기업주들을 국회의원으로 진출시키면 정치부패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왕상은 협성해운 회장, 김진재 동일밸트 사장(현 김세연 의원 부친), 박유재 에넥스 회장, 고판남 한국합판회장(당시), 박재홍 동양철관 회장, 이효익 삼익악기 회장 등이 대표적인 인사다. 기업주들이 국회 입성에는 성공했으나 정치인으로 크게 성장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기업도 안되고 정치인으로 발전도 안돼 씁쓸한 말년을 보낸 이들이 많다.

최근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몽준 전의원이 박원순 시장에 참패를 한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재벌에게 ‘통치권’이라는 최후의 권력은 주지 않는다는 진리다. 중세 유럽의 메디치 가문이 몇 대에 걸쳐 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정치와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고 경주의 최부자집이 300년 넘게 1만석 지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진사 이상의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만 갖고도 온갖 권력을 휘두르는데 통치권마저 갖게 되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부와 권력과 명예 3가지를 한사람에게 주지 않은 것이다. 재벌과 정치의 함수 관계가 그래서 복잡한 것이 아닐까.



 

출처 : 조은 세상과 함께
글쓴이 : 용비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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